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5-11-3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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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다음날인 금요일 하루 휴가를 내면 내리 나흘을 놀게 된다. 매년 그걸 알아도 쉽게 휴가를 내보지 못했다. 일주일에 하루만 노는 날이 끼어도 바빠서 허덕거리는데 이틀이나 놀 여유가 웬만해선 없기 때문이다.
사회부나 경제부, 국제부 같은 곳은 매일 발생하는 뉴스로 신문을 만들기 때문에 노는 날이 되면 그냥 맘 편히 놀아버리면 되지만, 특집부들은 노는 날과 상관없이 요일별로 발행되는 특집섹션을 마감해야하기 때문에 휴일이 끼는 주간이면 오히려 더 정신없이 일해야하는 고충이 있다.
그러한 고충을 감수하며 올해는 눈 딱 감고 휴가를 내었다. 나흘을 놀아보자고 작정한 것이다. 운 나쁘게 일요일 당번이 걸려 하루는 까먹게 되었지만 사흘만 푹 쉬어도 좋을 것 같았다. 이번 연휴에는 싸돌아다니지 말고 완전히 집에서 뻗어보자, 결심을 하였다.
그 황금연휴를 다 보내고 나온 지금, 나는 과연 얼마나 잘 쉬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도 못 쉬었다. 그렇게 많아보였던 시간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고, 쉬어야 하는데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스트레스로 인하여 신경질만 잔뜩 나있는 것이다.
연휴 첫날 땡스기빙 데이는 잘 보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언니 집에 온 가족이 모여 맛있는 터키 디너를 먹었으니까. 디너만 먹은게 아니라 대낮부터 국수 삶아먹고 새우 튀겨먹고, 밤 고구마 구워먹고, 과일 깎아먹으며 종일토록 먹기만 했는데, 원래 그러기로 되어있는 날이라 죄책감 없이 먹고 마셨다.
땡스기빙 다음날, 드디어 본격적으로 쉬기로 되어있는 날이다. 그런데 이런 날은 왜 쓸데없이 일찍 눈이 떠지는 것일까. 침대에 누워 뒤척뒤척 하는데 갑자기 코스코에 가야만 살 수 있는 품목들이 머릿속에 뭉개뭉개 떠오르기 시작했다. 갈까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벌떡 일어났다.
‘남들은 애프터 땡스기빙 세일 샤핑하느라 난리들인데 하다못해 코스코라도 가자’
카트로 하나 가득, 얼마나 많이 사들였는지 정리에만 몇시간을 투자하고 나니, 남편과 아들이 별미를 만들어 달란다. 그러자 오랫동안 모시지 못했던 시어머님 생각이 났고, 저녁식사에 어머님을 모셔오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하고 커피 끓이고 과일을 깎다보니 한밤중이다. 그래, 내일은 확실하게 쉬자.
토요일이 되었다. 오늘은 진짜 집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말아야지,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시간이 슬금슬금 지나면서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남들은 다 샤핑하러 다니는데 내가 이러구 집에 있어도 되나’ ‘지금이라도 나갈까?’ ‘아니야, 집에서 쉬기로 했잖아’ ‘보통땐 샤핑 할 시간도 없는데 이런 날 나가야 되는거 아니야?’ ‘아니, 샤핑은 바쁜 시간 쪼개서 하고 오늘은 그냥 꼼짝 않고 쉬어야해’
마음속에서 오만가지 생각들이 싸우고 있었다. 그런 한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있는 나 자신을 향해 죄책감마저 밀려오기 시작한다.
‘이렇게 놀 시간이 있으면 부엌 선반 정리부터 해야하는데… 오븐 때 앉은 것도 한참이고… 애 책상은 얼마나 엉망인지… 화장대도 먼지가 뽀얗네… 서랍 속 잡동사니들도 장난이 아니잖아… 옷장까지 손대려면 3박4일이 모자랄거야… 손빨래, 다림질할 것도 밀려있고… 욕실 청소도 제대로 하려면 한나절 잡아야 하는데… 저기 밀린 잡지하고 책들은 다 언제 읽고…’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면서 내가 이러구 놀아도 되나. 그냥 이렇게 앉아 있어도 되나,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으면 쉬어지는 건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시간이 오후로 넘어가자 자꾸 시계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놀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하고 있는 것이었다.
황금연휴를 이렇게 속 시끄럽게 자알~ 쉬었다.
이번에 얻은 교훈 두가지, 너무 바쁘게 사는 우리는 쉬려고 해도 쉴 줄을 모른다는 것과, 마음이 쉬어야지 몸만 쉰다고 쉬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바쁘게 일하면서도 마음이 고요하면 쉬는 것이고, 몸은 놀고 있어도 마음이 번잡하면 쉬지 못하는 것이다.
쉼이란 다 놓는 것이다. 일을 놓고, 몸을 놓고, 마음을 놓고, 시간을 놓는 것…
쉬는 것도 배우고 연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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