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할아버지

2005-11-2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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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곳은 함경북도의 중소도시에서 3킬로쯤 떨어진 마을이었다. 읍에 있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네 살 위인 언니 손을 잡고 매일 걸어서 통학하였는데 전날까지 어머니 치마꼬리를 잡고 잠시도 놓칠세라 졸졸 따라다니던 내가 처음 또래의 친구들이 생겨 신이 나고 학교가 너무너무 재미가 있었는데 한가지 속상한 것이 아침마다 이상한 아이들을 만나게 되는 일이었다.
도중에 넓은 야채 밭이 있었는데 근처 토막에 사는 아이들 몇이 나와서는 우리를 향해 “일본 간나야~”(간나, 여자아이를 욕하는 사투리) 합창하듯 소리지르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욕을 먹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우리 자매는 손바닥에 땀이 배도록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앞만 보며 걸음을 재촉한다. 그 노릇을 1년 동안이나 하루도 빼지 않고 겪어야 했으니… 처음에는 무서워서 곁눈질도 못했는데 그 아이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땟국물이 꾀죄죄하고 저고리 앞섶에는 콧물이 말라붙어 번들거렸다.
당시 일본인들은 더러운 조선사람을 노골적으로 경멸하고 싫어했었다. 아마 그 동네 애들은 일본인에게 “키다나이”(더럽다)라는 말로 호되게 멸시를 당했음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일본 아이 같이 깨끗해 보이는 우리를 일본 애들로 알고 한풀이를 했으리라. 마음껏 목청을 돋우어 “일본 간나야~ 일본 간나야~” 얼마나 후련했을까! 그러나 우리에겐 죽을 맛이었다.
내가 2학년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시내에 큰집을 사시고 학교 다니는 손주들을 맡아주셔서 그 지긋지긋하던 “일본 간나야~”라는 욕을 면하게 되어 얼마나 행복했던지 모른다.
우리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소신인 극일정신을 받들어 딸들이 밖에 나가 일본아이들에게 뒤지지 않도록 옷, 모자, 가방, 구두, 학용품 일체를 최고품으로 장만해 주고 머리도 어른 이발관에 가서 ‘가리아게’를 시켰으니 일본애들 중에서도 상류에 속하는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알뜰한 살림꾼이어서 평소에는 절약을 하고 써야 할 데에는 아낌없이 쓰는 분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애국이니 독립운동이니 그런 끔찍한 말씀은 안 하셨지만 “비록 우리가 나라를 빼앗겼을 망정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며 무엇이든 일본인보다 잘 하면 그들도 우리를 함부로 무시 못할 테니 그게 바로 일본을 이기는 길이라 즉 ‘극일’이 된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면 우리 할아버지야말로 숨은 선각자셨다. 고향을 버리고 오는 사람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고 일거리를 주어 살 수 있게 돕고 “가난하더라도 집 주위를 깨끗이 쓸고 아이들을 잘 씻겨주고 좋은 옷을 못 입혀도 터진 옷을 입혀 내보내지 말고 안 사람이 부지런해야 한다”고 교훈하시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나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밥 먹을 때 30번씩 꼭꼭 씹어먹었는데 그 버릇이 아직도 남아 어디를 가든 제일 꼴찌로 수저를 놓게 된다. 할아버지는 큰 부자는 못 되었으나 도량이 넓은 분이었다.
읍에서 올라오는 신작로에 자비로 가로수를 심고 마을로 들어오는 길 양쪽에는 개울을 파고 물고기를 노닐게 하여 오가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마을 어귀에 2,000평짜리 옥수수 밭이 있었는데 아예 남들이 따먹게 했었다.
한번은 초등학교에서 소풍가는 선생에게 귀띔을 하여 돌아오는 길에 300~4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와~ 하고 달려들어 쑥밭을 만드는데 할아버지께서 만면에 미소를 띠고 건너다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밭은 땅이 좋아 장정 팔뚝만한 찰강냉이가 진짜 꿀맛이었지… 봄가을에는 소를 잡아 일꾼들에게 갈비파티를 해주었고, 여름에도 국수틀을 빌려다 냉면잔치를 하던 일이 생각난다.
우리가 서로 다독거리며 챙겨주고 자중하여 저들 눈에 거슬리는 일을 삼가고 부지런히 일하고 자식들을 제대로 가르치면 좋은 날이 반드시 온다던 우리 할아버지는 당신 나름대로 마음껏 잘 사시다 1941년에 영영 눈을 감으셨다.
해방이 되고 할아버지의 자손들은 무질서한 세력에 밀려 모든 것을 잃게 된다. 할아버지 생전에 독립 운동하는데 적지 않은 자금을 댄 사실이 장부에 적혀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으나 우리는 그 곳에 희망을 걸 수 없으매 38선을 넘었다. 독립자금을 댔으니 당당하게 산다며 북에 남으신 백부님(할아버지의 장남)은 아우지 탄광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풍문에 들었지만 사실 여부를 알아볼 방도는 없었다.
60년이 지난 지금 고향은 어찌 변했을까? 가슴이 저려온다.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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