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치를 담그면서

2005-11-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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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큰맘 먹고 배추 한박스를 샀다. 중국산 김치에서 기생충이 나왔다는 둥 연일 시끄러운 신문보도 때문이 아니라, 교회 식사당번이라 겉절이를 하려고 배추를 고르다가 그냥 그렇게 돼버렸다.
애초엔 네통만 사야지 싶었는데 시퍼런 겉잎속에 실하게 찬 노란 배추속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또 그 유혹(?)에 빠지게 된 것이다. 두 식구 살면서 배추 한 박스를 사다 김치를 담그는 것이 무모한 짓이란 건 배추박스를 차안에 낑낑거리며 싣는 순간부터 들기 시작하지만 그땐 벌써 때늦은 후회이며, 어쩔 수 없는 일이 된다.
누구는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하고 노래하지만 나는 배추 앞에만 서면 왜 마음이 약해지는지 모르겠다. 눈 딱 감고 만들어진 김치를 사 가지고 나오면 모를까, 어쩌다 김치 좀 담글까 싶어 배추 앞에만 가면 늘 한 박스를 겁도 없이 들고 오는 것이다.
이유는 늘 있었다. 배추가 고소하게 생겨서, 네댓 통 사는 김에 몇달러 더 보태면 한 박스를 살 수 있기 때문에 절약하는 마음으로, 또 화학조미료 안 들어간 김치 이왕 담그는 김에 누구누구랑 나눠 먹어야지 하는 기특한 마음까지, 아무튼 그래서 이번에도 한 박스를 사들고 왔다.
부엌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배추포기를 자르기 시작하는데 오~잉! 생각보다 배추속이 더 꽉 차 있고 노란 속이 너무 고소하게 생겼다.(이럴 때 나는 참 기쁘다. 탁월한 선택을 한 것 같기 때문이다) 박스 안에 나란히 누워있던 12포기를 쪼개 소금에 절이는데 큰 양푼 하나로 안돼서 여행 다닐 때 쓰던 아이스박스까지 동원됐다.
다음날 저녁, 가게 일을 마치고 와서 아침에 일가기 전 씻어서 소쿠리에 건져놓은 배추 속을 만들기 위해서 무를 썰기 시작했다. 안하면 말까, 일단 시작하면 뭐든 정식으로 해야만하는 나니까 손으로 무채를 썰고 마늘도 까서 찧고, 난리를 치며 김치 속을 다 넣고 정리하고 뒷설거지까지 끝내니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김치 한병 사면 간단하게 끝낼 일을 이틀동안 이 무슨 수고롭고 번거로운 일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굽혀진 허리를 피느라 그 늦은 시간에 둥글레 차를 한잔 마시며 쉬고 있는데 싱크대 위에 나란히 늘어선 김치병 속의 김치들이 예쁘고 대견하게 느껴졌다. 아하, 이런 기분은 이렇게 애쓰면서 수고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걸, 하고 있는데, 갑자기 후배 말이 생각난다. “그런 기분 느끼려고 힘들게 그런 일을 한단 말이야?” 알 수 없다는 듯이 말하던 후배는 열번을 죽었다 깨도 이 기분을 모를 것이다.
메주를 띄우느라 온 집안을 퀴퀴하게 만들고 간장을 달이느라 코를 쥐어 잡게 만든 엄마가 식구들의 그 불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늘 된장, 고추장, 간장을 만들어 놓고 장독대를 오르내릴 때마다 여봐란듯이 자랑스러워하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아마 거기엔 장맛 좋다는 이웃들의 칭찬에 사뭇 고조된 엄마의 프라이드가 섞여 있었을 것이다.
고작 고추장, 된장 항아리를 날마다 아끼면서 닦아주고, 뚜껑 열어서 볕 쪼이고, 갑자기 비라도 내리는 날엔 맨발로 뛰쳐나가 뚜껑 닫는 일에 그토록 목숨을 걸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몸의 수고가 많이 따르는 장 담그는 일 뒤에 오는 그 뿌듯함이 좋았던 걸까. 집 식구들 일이년 기본 반찬이 내 수고와 정성이 근간이 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좋았던 걸까…
해도해도 끝이 나지 않는 집안 일이 늘 귀찮고 하찮게 느껴져서 이 일에서 언제 탈피하나 이를 갈면서도 때때로 김치를 담그거나, 깻잎장아찌를 만들거나 밑반찬 등을 정성껏 만들다보면 내 자신이 순정해지는 걸 느낄 때가 있다.
무모하게 배추 한 박스를 들고 오는데는 아무 잡생각 없는 그 몰두와 정성을 다해 식구를 먹인다는 그 따뜻한 사랑을 내 안에 지필 수 있어서일 것이다.
배추 12포기를 담갔던 김치가 이제 2병밖에 남지 않았다. 교회 식구들과 주일날 점심 먹는데 쓰였고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퍼주느라 그렇게 됐다. 김치를 덜어주는 내 모습엔 분명 엄마의 모습이 있었을 것이다. “맛있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깨끗하지”하며 여봐란듯이 자랑스러워하는 그 모습이 말이다.

이영화 <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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