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5-11-0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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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음식사랑

타주의 사립대학에서 가르치는 한국인 교수와 식사할 일이 있었다.
점심때마다 수많은 식당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LA 직장인들의 ‘즐거운 고충’에 대해 경이감과 부러움을 표시한 그는 자신의 학교 근처에는 식당이라고 맥도널드와 이탈리아 식당 딱 두군데 밖에 없어서 학교 밖을 잘 나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학교의 다른 교수들도 점심을 아예 먹지 않거나 오렌지나 사과 하나 먹고 마는데, 자신이 알기로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점심식사를 그처럼 간단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한인들을 만나면 먹는 일에 너무 치중하는 것을 보게돼 놀란다는 그 교수는 어느날 등산에 따라나섰을 때의 경험을 이렇게 전했다.
“열심히 산을 오르는데 누군가 김밥을 권하더군요. 그러더니 시루떡이 나오고, 인절미가 나왔어요. 과일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고, 마호병에 커피를 담아온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술을 가져온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물 한병 들고 걷는 미국인들이 보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풍경이다.
언젠가 영국인 남편을 둔 친구 집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점심을 먹고 가라고 해서 식탁에 앉았다가 깜짝 놀랐다. 그래도 손님이니 뭐 좀 별미라도 나올 것이라 기대했는데 식탁에는 달랑 딱딱한 바게트 빵과 구운 소시지 한쪽씩, 그리고 사과 한 알씩이 놓여있었던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나는 너무 놀라서 “아니, 이게 점심이냐?”고 묻고 말았다. 그랬더니 친구가 막 웃으면서 남편에게 “숙희가 영국 식탁의 단순성에 깊이 감명 받았다”고 농담하였다.
만일 한국사람이 자기 집에 온 손님에게 밥과 국, 김치, 세가지만 차려낸다면 그날로 원수가 되지 않을까?
우리 한국사람들만큼 먹는 일이 중요한 민족이 없는 것 같다. 이사를 가도 음식을 돌리며 첫 인사를 하고, 사람이 죽어도 상가에서 밤새 먹을 것을 해낸다. 산사람은 물론이요 죽은 영혼을 위해서도 일년에 몇 차례나 상다리가 부러지는 제사상을 차리고, 성묘갈 때도 음식을 한아름 싸들고 가서 무덤 주위에 소주까지 뿌리는 민족이 한민족이다.
고향을 떠나온 이민자들이어서 더 그럴까? 미주한인들이 모이는 곳에는 늘 잔치 수준의 상이 차려진다. 교회에서 예배 끝나면 반드시 교인들이 밥을 먹어야하기 때문에 이를 전담하는 부서가 따로 있는 것도 한인교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주일예배만 그런가? 새벽예배 후에도 빵과 커피를 대접하는 교회들이 많고, ‘특새’로 불리는 특별새벽기도회 기간에는 새벽마다 국밥을 끓이는 곳도 있다. 구역예배는 또 어떤가? 예배보다 식사가 주인공인 구역이 많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공원에서 피크닉이나 야유회를 할 때, 여행을 갈 때도 가장 먼저 걱정하고 계획하고 챙기는 일이 먹는 일이고, 운동하기 위해 모이는 마라톤 동우회마저 순번을 정해 식사당번을 하면서 뛰고 나면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먹는다고 들었다.
각종 행사의 리셉션도 마찬가지다. 미국 갤러리의 오프닝에 가보면 과자 몇 종류와 음료수, 약간의 치즈와 와인 정도만 놓고 담소하며 그림을 구경하는데 한국 갤러리 오프닝에 가면 김밥, 스시, 만두, 샐러드, 잡채, 떡, 샌드위치, 과일 등이 접시마다 수북해 풀코스로 저녁식사를 할 수 있다.
LA한국문화원에는 오프닝 때마다 반드시 찾아오는 외국인들이 있단다. 이 사람들은 한국예술에 조예가 깊어서라기보다 그날이 잔칫날인줄 확실히 알기 때문에 스케줄을 챙겨서 놓치지 않고 찾아온다는 것이다.
한국인 중에서도 먹는 일에 가장 집착하는 사람들은 ‘할머니’들이다. 자신들의 식탐도 대단하지만 자자손손 식구들 먹거리를 챙기는 일에 있어서는 이성을 잃는 모습을 종종 보게된다. 아무리 뚱뚱한 손주도 할머니들에게는 너무 약해 보이고, 배탈이 났다고 해도 뭘 좀 먹여야 나을 것이라고 걱정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적하는 나도 별 수 없는 한국엄마인가 보다. 아들을 만나면 나오는 첫 마디가 “뭐 먹었니?”이기 때문이다. 나의 반복되는 질문에 한숨을 쉬던 아들이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내가 뭘 먹었는지 궁금해하지 말고, 앞으로 나에게 뭘 먹게 해줄 것인가를 걱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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