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5-10-26 (수)
크게 작게
스톱 사인에 멈춰 섰을 때 차의 앞 유리창 위로 마른 낙엽 두 개가 호로록 떨어져 내렸다.
그때 나는 23년을 살아온 LA에서 첫 가을을 맞이하였다. 그동안 스물두번이나 맞았던 가을은 여름과 겨울 사이의 야트막한 틈새, 그 틈새로 가을은 바람 한번 불지 않고 사라졌다.
내 인생에 가을은 한번도 없었던가? 그래, 아무 것도 생각나는 가을이 없다. LA에서 뿐 아니라 단풍이 흐드러졌던 한국에서도 가을은 계절의 가을이었지, 내 마음의 가을은 아니었다.
올해 처음 바람이 차다고 느끼고, 그 시시하던 나무들에서 낙엽이 떨어지는 것도 보이고, 바바리코트 입은 사람이 멋있어도 보인다. 올해 처음, 내 마음에 단풍이 들고 바람도 불고 낙엽이 진다. 그리고 올해 처음, 가을낙엽에 마음이 소슬해지고 적적해진다. 이제야 여자가 되었는지, 아니면 이제야 인간이 되었을까.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라고 노래하던 가수 최백호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딱 지금의 내 마음 같아서 일부만 옮겨본다.
“나이를 먹으면 모두 다 이렇게 조금씩 만사에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어 자연과 얘기를 나누기도 하며 마음이 넓어지는구나. 이 가을엔 숨소리조차 죽이고 유리 위를 걷듯, 거울 위를 걷듯 조심스레 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살아야겠다. 나이가 들어도 저 가을처럼 고운 빛으로, 천하지 않게 늙고 싶다.
그야말로 혹서의 열기 속에서도 언뜻 실낱처럼 지나가는 가을의 숨결이 느껴진다는 건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거라고들 한다. 하지만 계절의 변화를 그렇게 민감하게 느끼기 시작한 건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이고, 숲과 들의 꽃들과 나무들의 미세한 표정 변화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 전의 일이다.
…나는 매일 밤 노래하는 미사리의 카페에서 대부분이 60, 70, 80 세대인 관객들에게 간혹 이런 얘기를 한다. ‘세상이 이상하게 망가져서 나이 들면 사람 취급을 안 하는 세상이 돼버렸지만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남아서 그런 놈들한테 그야말로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면 모두들 좋아라 하고 박수를 치신다.
나이가 들면, 늙으면 ‘편’이 없어진다. 어느 날부터 내‘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줄어든다. 어느 날엔가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없어진다. 내 노래를 들어주지 않는다.
…계절이야 인간이 선을 그어 놓은 거지만, 그래도 봄-여름-가을-겨울 사계 가운데 가을이 가장 신중하고 과묵해서 좋다.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가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느냐”기에 얼떨결에 “유리 위를 걷듯이 지내고 있다”고 멋진 대답을 한 적이 있다. 정말 이 가을엔 숨소리조차 죽이고 유리 위를 걷듯, 거울 위를 걷듯 조심스레 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살아야겠다. 나이가 들어도 저 가을처럼 고운 빛으로, 천하지 않게 늙고 싶다. 멋진 선배로, 존경받는 노인으로, 신선으로”
최백호가 아니라 누구라도, 가을의 유리같이 맑은 고독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조물주가 가을을 만들어놓았을 턱이 없지 않은가.
가을은 옷깃을 여미게 하고 마음 깃도 여미게 한다. 한여름에 흐물흐물 내려앉았던 마음이 어느 틈에 추스러져 단단한 마음으로 겨울을 나게되는 것이 가을 덕분임을 이제야 알겠다. 이 나이 돼서도 이제야 알아지는 것이 있으니 인생은 살만한 것일까. 어떤 나이도, 충분히 살아서 더는 알 것이 없는 나이는 없을 것이니.
어느 날엔가 내 편이 없어지고, 내 이야기와 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없어지더라도,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떠나면 겨울을 맞이할 것이다.
오늘 나는 오래 전 나의 마음에서 떠난 사람, 나에게 상처 준 사람, 다시 보고 싶지 않던 사람마저 그리워진다. 이 가을병이 앞으로는 해마다 도지지, 싶은 것도 낯설고 새로운 가을 마음.
이제 가을은 내 마음의 깊은 우물, 영원한 고향이 되었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