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겨울준비

2005-10-23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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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밤이 길어졌다. 내 가게는 저녁 7시면 문을 닫는데, 어느 날부턴가 가게문을 닫고 밖으로 나서면 어둠이 거리에 몰려와 있었다. 하긴 이제 10월도 한 주밖에 안 남았으니 그럴 시기가 되기는 했다. 이제 요상한 복장을 한 동네 꼬마들이 캔디를 얻으러 다니는 핼로윈만 지나면 곧바로 달력을 11월로 넘겨야 할 판이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늦더위가 다시 찾아와 에어컨을 다시 켜기도 했는데, 이번 주엔 또 며칠씩 비가 온 뒤끝이라 날씨가 선득선득하여 따뜻한 국물이 저절로 생각이 났다. 침실 이불을 바꾸고 옷가지들도 몇 가지 찾아 내놓고 길어진 밤을 위해 서점에 가서 따끈따끈한 신간 여러 권을 사다놓고 나니 겨울준비를 제대로 해놓은 것 같아서 마음이 뿌듯하다.
힘들게 글쓰는 소설가나 수필가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서점에 가서 선뜻 소설책이나 수필집을 여러 권 한꺼번에 집게는 잘 안 되는데, 이번에는 큰맘 먹고 다섯 권을 사 가지고 왔다. 두어 달 기다리면 한국 책이 비교적 많이 있는 피오피코 도서관에서 빌릴 수도 있으련만, 얼른 보고 싶어서 가계부 지출을 늘린 것이다. 물론 가계부 지출 내용은 당연히 ‘문화비’다.
주거비, 식료품비, 의복비, 인격 유지비, 기타 등등 난 외에 오랜만에 문화비를 부끄러운 마음 없이 적을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늘 문화비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한국 비디오를 시시때때로 취미 삼아 보는 나니까, 비디오 대여비를 어느 명목으로 잡을까 고심하다 떡하니 문화비 난에 슬쩍 끼워놓은 것이 벌써 오래 전 일이다. 그러고 보니까 극장가서 영화 본지도 오래됐고 음악회 간지는 벌서 2년쯤 된 것 같다(아, 선배가 마련해 준 공짜티켓으로 뮤지컬이랑 이문세 공연을 올해 간 적이 있긴 했구나).
학교 졸업하고 첫 직장이 잡지사였고 그 다음은 출판사였다. 미국 오기 전까지 문학서적을 편집하면서 순수문학이 왜 그렇게도 안 팔리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었다. 지금은 저작권 문제가 있으니까 어림없는 이야기지만, 이맘때쯤 발표되는 노벨 문학상 수상작을 다른 출판사보다 하루라도 일찍 출판해 내느라 모텔을 빌려놓고 번역 작업하고 바로 교열보고 인쇄소로 넘기고 그러느라 일주일간 집에도 못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코피까지 쏟아가며 만든 책의 판매량은 늘 우리들의 기대에 못 미쳤었다.
그때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우리는 꼭 책 읽는 인간이 되자. 연극도 보고 화랑도 가고 음악회도 자주 가고 그러자. 그렇게 꼭 문화인처럼 살자. 꼭, 꼬옥 그렇게 살자” 그랬던 기억이 난다. 벌서 20년 전 일이다.
올해 여름이던가. LA에 문화의 장을 펼치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시작한 ‘정동 아트홀’이 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생겼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때 그 기사를 읽으면서 참 여러 생각이 들었었다. 나같이 입으로만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좋은 취지에서 만들어진 문화공간이 아깝게 문을 닫는구나. 다음 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곳에서 하는 공연엔 꼭 한번 가봐야지 그랬었는데 도통 그 다음엔 공연 광고를 본적이 없다. 너무 때늦은 후회가 아니길 이 글을 쓰는 동안 바라본다.
가게에서 일을 하는 동안 틈틈이,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짓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내내 아, 이 일을 마치고 어서 사다놓은 저 책들을 읽어야지 하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설렌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쓴 소설책이 두 권이나 있고 지구촌 곳곳을 씩씩하게 누비며 좋은 일을 하는 한비야가 쓴 책도 있다. 귀한 음식을 대하듯 조금씩 아껴가며 살살 읽어갈 것이다. 생각만 해도 행복한 일이다.
내친 김에 올해 노벨 문학상 후보로 막판가지 경합을 벌였다가 안타깝게 또 후보로만 그친 시인 고은의 가을편지(노래를 통해서 더 많이 알려진)라는 시 한편을 옮기면서 오랜만에 책 몇권 사들고 문화를 호들갑스럽게 소회하는 소인배의 글을 마칠까 한다. 어둠이 쉬이 내리는 이 계절, 각자 잊었던 문화적인 욕구가 얼마간 되살아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 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이영화 <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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