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족과 관계 이야기

2005-10-1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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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연습과 말하는 연습

40대의 심씨는 15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가끔 돌이켜 보곤 한다. 물론 과거의 실수를 현재나 미래에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언제부터인가 남편이 유난히 바빠졌다. 큰 회사의 마케팅분야를 담당하던 남편의 귀가는 날마다 늦어졌다. 주말은 중요한 고객들을 모시고 골프장을 비롯하여 고객 접대를 위해 다니느라 얼굴 구경조차도 어려웠다.
언제인가부터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직감이 왔다. 하지만 꼬치꼬치 따지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구차한 변명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심씨 자신도 어차피 남편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상한 자존심과 상처받은 감정들에 대해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화를 통하여 문제의 원인과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노력을 하는 대신에 남편 못지 않게 바쁜 심씨 자신이 되어갔다. 자신이 시작한 작은 사업과 두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는데 모든 기운이 다 쓰였다. 하루에 4시간 이상의 수면을 취한 적이 별로 없었다. 숨돌릴 시간조차도 없는 생활, 즉 생각, 사고, 느낌 그리고 대화 부재의 삶을 살았다. 단지 기계적으로 쳇바퀴 도는 생활만을 하였다. 돌이켜보면 자신이 어떻게 그 모든 일들을 해내었는지 아찔하기만 하다.
어느 날 남편은 여자 친구를 데려와서 소개시켰다. 곧 이혼을 신청했다. 이혼 결정을 먼저 한 남편이 한없이 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고마웠다. 애정이 결핍되고 껍질만 남아서 돌아가던 결혼생활에서 해방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갑자기 자신의 역할을 빼앗긴 공허함과 허탈감을 견디다 못해 알콜에 의존하게 되었다. 일만 하던 삶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극단의 삶을 한두 해 살았다.
다행히도 이곳 저곳에서 교육과 상담 등의 과정을 받으면서 자신의 삶을 재설계하려는 의지가 생겼다. 이제는 새로운 배우자와 듣고 말하는 연습을 자주 실습한다. 기분이 좋거나 안 좋거나 함께 나누는 연습을 한다. 듣는 연습을 할 때는 말하는 이의 감정상태를 알아듣기 위해 온갖 귀를 기울인다. “그 일로 당신이 많이 속상하겠다.” “당신 기분이 엄청 좋은가 봐!” 가끔은 “당신이 지금 이런 느낌이야?” 하고 묻기도 한다.
자기 방어 혹은 상대의 감정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반칙이다. 말하는 연습을 할 때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스스로 인식하고 알아야 하므로 자신의 감정상태에 귀를 기울이는 작업이 선행되곤 한다.
“나는 지금 굉장히 속상해.” “난 계획했던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자꾸 화가나!” “난 배가 부르면 행복해져!” 등을 기회가 될 때마다 대화에 끌어들인다. 상대방을 비난 혹은 비판하는 것은 반칙이다. 건강한 대화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이제는 대화부재의 결혼생활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새롭게 다짐한다. 오늘도 건강하게 듣고 말하는 연습중이다.

이 은 희<결혼가족상담전문인>(leelmft@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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