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5-10-12 (수)
크게 작게
얼굴의 크기

미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지만 요즘 한국인이 선호하는 외모는 완전히 서구형이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신체조건은 근본적으로 다른데도 백인여성들의 미적 기준이 모든 여성의 기준이 되어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같아지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런데 수술하지 않고도 우리의 생활이 서구화되면서 신기하게 비슷해진 신체조건이 있다. 얼굴의 크기다. 과거 한국이 못 먹고 살 때는 다들 키도 작달막하고 머리가 커서 5~6등신 정도의 체형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을 보면 키가 훌쩍 크고 팔다리가 길며 얼굴이 작은 8등신이 많아졌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요즘은 얼굴이 크면 무식하고 촌스럽게 느껴져 다들 작은 얼굴을 선호하고 부러워한다. 특히 연예인들은 정말 얼굴이 작아서 직접 만나보면 어린아이 손 한뼘만 하니, 우리 같은 사람이 TV에 나오면 화면이 모자라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나는 얼굴이 작은 편은 아니지만 결단코 큰 편도 아니어서, 얼굴이 좀 크다 싶은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하곤 했다. 화장품값 덜 들겠다고도 하고, 세수할 때 표면적이 작아 시간이 덜 들겠다는 농담도 듣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 남편이 무슨 이야기 도중 날보고 ‘얼굴이 크다’고,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처음에 농담을 하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정색을 하고 물어보니 남편은 진정어린 표정으로 나의 얼굴이 크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충격이란… 나는 방방 뜨면서 내 얼굴이 왜 크냐고, 어디가 크냐고, 얼마나 크냐고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 나를 보고 얼굴이 크다고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는데 그게 바로 당신이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편이 그럴 수가 있냐, 그것도 연애 막 시작한 것도 아니고 십몇년을 살고 나서 그런 소리를 하다니, 그 오랜 세월동안 나에 대해 치명적인 오해와 편견을 갖고 있었던거 아니냐…” 분하고 억울하여 펄펄 뛰다가 결국은 ‘대보자’가 되었다.
둘이 거울 앞에 나란히 서서 얼굴 크기를 대보았고, 함께 찍은 사진들을 꺼내놓고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사이즈를 비교하였다. 결국 내가 주장하는 만큼은 아니지만 자신이 생각해온 것처럼 내가 큰바위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 남편은 매우 혼란스럽고 멋쩍은 표정이 되어 “이상하다, 이상하다…” 를 연신 되뇌었던 것이다.
그 이후 얼굴 크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내가 또다시 분에 못 이겨 씩씩대면 남편은 “당신 얼굴이 너무 보름달 같이 훤해서 그랬던거야”라며 슬그머니 피하곤 한다. 보름달 아니고 초생달이고 싶은 여자의 마음을 몰라도 유분수지, 그나마 뒤늦게라도 잘못 입력된 정보를 수정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죽을 때까지 자기 마누라의 ‘진면목’을 몰랐을 것 아닌가.
한편 우리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진짜 얼굴이 작았다. 10세 전후로 살찌기 전에는 아이가 작은 얼굴에 몸은 날씬하고 탄탄하며 팔다리가 길어서 얼마나 이뻤는지 모른다. 특히 다른 한국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보면 눈에 띄게 머리통이 작아 늘 흐뭇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얼마전 또다시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아들은 여름방학 때부터 검도를 시작하였다. 친구들 한다고 따라 나서더니 재미를 붙여 도복도 사고 괴상한 기염을 토하며 맨발로 마루바닥을 치고 다닌지 두달, 이제 머리에 뒤집어쓰는 호구를 사야한다고 하였다.
거금을 들여 한국서 주문한 호구가 도착하던 날, 도장에 가니 하필 아들 것만 오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아들의 ‘얼굴이 너무 커서’ 어른 것을 주문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좀 늦는다고 하였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였다.
“아니 우리 아이는 얼굴이 작은데요, 그럴 리가 있나요”
“아니에요. 다른 아이들보다 유난히 커서 얘만 어른 것을 오더했는데요”
하도 기가 막히고 안 믿어졌지만 일단 집으로 돌아와 남편을 붙들고 마구 불평했다. “말도 안 돼, 얘가 얼굴이 크대, 쟤 얼굴이 어디가 크다는거야, 얘만 어른걸 주문했다니, 말이 돼?”
“아니, 당신 닮아서 얼굴이 엄청 작은애를 보고 왜 그래”라고 아부하던 남편, 다음날 도장에 다녀오더니 풀죽은 얼굴로 말한다.
“자로 재봤는데 10센치가 더 크대”
입이 벌어진 채로 서있던 나는 아들을 세워놓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옆으로 보고 뒤로 보고 내려보고 올려보고, 아, 도무지 알 수 없는 얼굴 크기의 주관적 오묘함이여!
컬럼버스 데이 놀고 나오니 별로 쓸 것도 없어서 웃자고 써본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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