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위기의 남자

2005-10-0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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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까마는, 이삿짐을 싸다가 남편이 없어져서 찾아보면, 이삿짐 운반하는 차에 먼저 올라타 앉아있더라는 조크를 들은 적이 있다. 혹시 이미 무능해진 자신을, 가족들이 귀찮아져서 버리고 갈지 몰라서 그런다는 것인데, 설마 하면서도 이미 머리카락이 희끗하고 눈에 힘이 빠진 나이든 남자가 오도카니 이삿짐 차에 앉아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마냥 깔깔거리며 웃은 것이 미안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학교 다니던 80년대만 해도 우리 과 선생님들은 오십대 초반에서 중반이셨고, 어쩌다 삼십대 초중반 강사 선생님들이 젊은 축으로 몇 분 끼여 계셨었다. 그때 그 오십대 선생님들 그 누구를 생각해봐도 그리 초라한 느낌이 없었다. 외려 나이가 드신 만큼 학문의 깊이가 더 느껴졌고 진중한 태도에서 나오는 중후한 멋으로 외경심 마저 갖지 않았나 싶다.
시간의 흐름 속에 세태가 많이 바뀐 탓인지 나이든 분들이 어른으로 대접받는 시기는 점점 지나가는 것 같다.
우리가 자랄 때도 어른 말씀 안 듣고, 뒤에서 딴 짓도 하고 거역도 많이 했지만, 요즘처럼 대놓고 어른을 무시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 시절만 해도 어른은, 말 그대로 어려운 분이셨다. 하물며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 집안에서 식솔들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는 분인데, 그 수고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권위는 늘 존중받아야 했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라서,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들어오실 때쯤이면,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하라고 채근하시면서, 어머니는 부산하게 아버지 시간에 맞춰 따듯한 밥상을 준비하시고는 했다. 내 기억 속에 집안 대소사 일로 집을 비우시는 일 외에, 어머니가 과외로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셨다가 아버지 저녁준비를 놓친 적은 거의 없었지 싶다.
그런데, 조크이긴 하지만 그래서 과장이 심하게 섞여있긴 하겠지만, 자신을 떼어놓고 이사를 갈까봐 두려움에 떤다는 요즈음의 아버지와 남편들은 정말 자신들의 신세가 그렇게 추락한 것에 대해 얼마나 기막혀할지 나로서는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집만 해도 남편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일부러 남편한테 마음먹고 소원하게 대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어찌어찌 살다보니 그렇게 되어져가고 있다. 예전엔 밤이 긴 경우, 이미 저녁을 먹었음에도 속이 출출해진 남편이 “간단하게(?) 새우튀김이나 해먹지”하면 군말 안하고 냉동실에 있는 새우를 손질해서 튀겨주기도 했고, 냉면이나 시원하게 말아먹자고 하면 귀찮아하지 않고 그 수발을 다 들었었다. 짬뽕이 먹고 싶다면 없는 솜씨로 중국 집에서 먹는 맛을 흉내 내려고 애쓰기도 했으며, 마켓에서 장을 볼 때 그의 입맛에 맞는 것을 사느라 신경을 썼었다.
그런데 결혼생활 20년이 되는 요즘엔, 우리집 냉장고엔 새우도 없으며, 짬봉이나 냉면 대신 내 남편은 출출해진 속을 라면으로 달래고 있다. 만두를 좋아하셨던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 살아계실 때까지, “거 만두 좀 먹지”하시면 내 어머니는 그 다음 끼니에 아버지 밥상에 만두를 올려 놓으셨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평생 했던 일을 나는 한 10년쯤 하다가 그만둔 셈이다.
나는 감히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편한테 모나게 못하는 아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보통의 평범한 나 같은 여자도 세상 변하는 것에 시나브로 변한 것이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위기의 여자’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연극제목이기도 했지만, 자식들 다 키우고 나면 인생이 쓸쓸해져서 허무병을 앓는 여자들을 일컬었었는데, 우리 여자들은 이제 약아져서 더는 그 병들을 앓지 않는다. 이제는 홀가분해진 자신의 처지를 이용해서 친구들과 여행도 가고, 운동도 하고, 또 자신을 위해서 돈도 쓸 수 있는, 오직 여자인 인생에서 인간으로 변화하는 과정들을 똑똑하게 잘 공부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위기의 남자’ 시대가 온 것이다. 세상일에서 손을 놓고 집안으로 돌아와보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자식들은 자신의 손안에서 벗어났고, 아내는 세상 밖의 일을 알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들도 이제는 준비를 해야 한다. 십수년 전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애썼던 여자들처럼. 그래야만 이사하는 날, 오도카니 이삿짐 나르는 차에 먼저 앉아있는 불상사를, 그런 조크를 더는 듣지 않게 될 것 아닌가.

이영화 <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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