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5-09-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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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없으면

그저께 낮에 한인타운을 비롯한 LA시의 꽤 넓은 지역이 정전되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전기회사 직원의 실수로 그리 되었다는데 그 실수가 LA시민들에게 끼친 여파는 대단했다.
하필 점심시간에 신호등이 모조리 나가서 그 복잡한 6가와 윌셔 길이 주차장으로 변했고, 고층빌딩들이 암흑이 된 것은 물론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나도 점심 먹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간신히 트래픽을 헤치고 컴컴하게 불꺼진 지하 파킹 랏에 도착하니 엘리베이터가 작동되지 않아 3층까지 헉헉거리며 걸어 올라갔다. 편집국에 들어서자 컴퓨터는 물론 다 나갔고, 전기 불이 반만 켜 있다. 반이라도 불이 들어온 이유는 신문사 자체 발전기를 돌린 탓이다.
컴퓨터가 작동되지 않으니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기사를 쓸 수도 없고 이메일, 인터넷도 불가능했다. 누군가 “손으로라도 쓸까요?”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손으로 쓴 기사는 결국 다시 컴퓨터로 쳐서, 컴퓨터로 편집해, 컴퓨터로 공무국에 보내야하니 손이 아니라 뭘로 쓴들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신참 기자들은 “이러면 내일 신문 안 나와요?”하고 궁금해한다. 내가 알기론 전기 아니라 뭐가 나가도 그런 일은 절대 없다. 기자들이 파업해도 나오는게 신문이니까.
바로 전날 LA 테러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테러 아니냐고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걱정도 하지만 사태의 진전을 전혀 예상할 수 없는데서 오는 묘한 흥분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혹시 해야할 일을 안 해도 되는지, 오늘 마감을 내일로 미뤄도 되는지, 은근한 기대를 갖는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 조금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월요일 오후면 주방일기를 쓰는 날이다. 만일 오늘 하루 종일 불이 안 들어온다면?…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주방일기 못 쓰겠네” 아무도 반응이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할 수 없지 뭐. 이번 주 주방일기는 빈칸으로 나가야돼”
진짜로 그런 상황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내 심중을 비웃기라도 하듯, 말 끝나기 무섭게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 갑자기 ‘윙’ 하더니 사무실 전체가 소란해진다. 불이 켜지고 에어콘이 돌아가고 컴퓨터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런 순간 새삼 깨닫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은 문명의 소음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정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수십 명이 근무하는 사무실은 수많은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새벽에 일어나 부엌에 가보면 평소에 안 들리던 냉장고 소리가 들린다. 또 형광등을 켜면 징~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니 수십개의 형광등이 켜진 실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에어콘 소리, 수십대의 컴퓨터가 다함께 켜있는 ‘전기의 소리’들이 한데 뒤섞인 사무실은 아무리 드넓은 공간이라 해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소음의 벽들로 서로서로 차단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기가 그보다 더 심한 소리를 낸다 해도 우리는 전기 없이는 살 수가 없다. TV도 못 보고, 컴퓨터도 못하고, 냉장고도 못 쓰고, 빨래도 손으로 해야하고, 음악도 못 듣고, 다림질도 못하고, 헤어 드라이도 못하고…
그중 무엇이 없으면 가장 불편할까, 하고 생각해보니 기자 입장에서는 컴퓨터, 주부 입장에서는 단연 냉장고였다. 도대체 냉장고가 없다면 어떻게 음식을 해먹고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뉴올리언스 생각이 났다. 이렇게 잠깐의 정전 소동으로도 일상 전체가 마비되는데 전화, 전기, 개스가 모두 끊긴 상태에서 물난리를 겪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정말 마음으로 고통이 전해져왔다.
에디슨 할아버지가 발견한 전기, 그가 발명한 전구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후에 전화니 컴퓨터니 자동차, 항공기, 인터넷 등등이 발명됐지만 그 모든 것의 기본은 전기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지금 전기가 없어서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전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런데 한 사람의 작은 실수로도 그런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니, 진짜 테러라도 나면 어떻게 될지, 정말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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