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카고에서 온 전화

2005-09-0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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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서 전화가 왔다. 첫 마디로는 감이 잡히질 않아 더듬거리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확 떠오르는 얼굴이 보인다.
그래, 그때 아마 갓 스물을 넘겼다고 했지? 흥남 철수 때 홀로 무작정 L.S.T.에 끼어앉아 모진 배멀미 끝에 떨어진 육지가 거제도 였다든가? 북에서는 함흥 의과대학 학생이었다고, 자유세계를 찾아 기를 쓰고 넘어온 남쪽에서 몸을 의지한 곳이 군대였고 그 부대의 대대장이었던 남편은 “똑똑하고, 순수하고, 혈혈 단신인데도 구김살 없이 명랑하다”고 칭찬하곤 했었지… 이제는 70을 넘겼을 이장로님의 목소리에서 옛 모습을 떠올리는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1951년, 바로 6·25가 터진 다음 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다 이긴 전쟁이 끝을 못 보고 전선에서는 1진1퇴 하며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후방 시민들은 그런대로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남편의 부대는 동해안 일대의 철로와 연변도로를 보수하고 지키는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대대본부가 삼척에 있었다. 부산은 피난민이 넘쳐 발 디딜 짬도 없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기만 하는데 서울은 미 수복지구라 돌아갈 수가 없고, 그러니 후방부대의 가족들은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근처에 방을 얻고 떠돌이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피난민에게서는 방세를 받지 않았으니까 전쟁 때문에 월급이 끊겼어도 그럭저럭 살았다.
어느 날 남편이 엉뚱한 부탁을 내게 했다. “1대대 본부요원으로 장교가 나까지 7명인데, 식사 때문에 문제야. 끼니마다 한결같이 소금물에다 콩나물 넣고 푹 끓여서 한그릇 주니 정말 힘들어요. 어때, 장을 봐줄테니 점심 한끼 부식 만드는 수고 좀 해주겠어? 밥은 우리가 가지고 나올게“
그 말을 듣자 나는 쾌히 승낙을 했다. 일선에서는 생명을 내놓고 싸우고들 있는데 점심 한끼쯤 봉사를 못하랴. 장까지 봐주겠다는데…
다음날 아침 홍안의 미소년이 함석 들통을 들고 나타났다. 내게 경례를 부치며 “사모님! 뭐든지 시켜주십시오”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것이 이장로님과의 첫 대면이었다.
삼척시장에는 인근 어장에서 모여든 생선들이 펄펄 뛰고 있었다. 값도 싸고 종류도 다양하다. 나는 아기를 업은 채 앞서서 걸으며 “이거 몇 마리”하면 이하사가 들통에 받아넣고 돈을 셈하고, 야채장사 앞에 가서 “이거 몇 단’ 하고 손으로 가리키면 척척 거리가 된다. 생선조림이나 찌개, 야채무침 단 두가지로 재료를 바꿔가며 양을 충분히 했다. 끼니마다 콩나물국 공세에 단단히 혼이 났던 장교들은 맛있다고 좋아들 했다. 나는 보람을 느끼며 즐겁게 봉사를 계속했다.
그날도 여전히 시장에 나가 돌아다니는데, 누가 우리 뒤를 멀리서 밟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드디어 그가 다가오더니 이하사가 들고 있는 들통을 빼앗아 내 손에 주면서 “아주머니! 이 군인은 대한민국에 생명을 바친 군인입니다. 아주머니의 남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함부로 자기 집 종 부리듯 해도 되는건가요?”하고 나를 노려보았다.
이하사가 당황하여 설명을 하려고 하기에 내가 막았다. 아기를 업은 아낙이 묵직한 들통을 들고 헌병에게 야단을 맞고 있으니 좋은 구경거리라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죽을 맛이었다.
삼척 1대에 주둔한 병력 중에서 남편의 계급이 제일 높다고 들었는데 이 마당에 그의 이름이 나오면 안 된다. 당장 아무개 마누라가 사병을 제 머슴 부리듯 하더라고 삼척 바닥에 소문이 날테니,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정말 잘못했습니다”
후에 그 말을 들은 남편은 “아 그래? 대한민국에 그런 뼈대있는 헌병이 있었어? 진짜 군인이구나. 됐어!” 나에 대해 미안한 생각이 전연 없는 듯 했다. 얼마나 부끄럽고 초라했었는데, 원인 제공자인 남편의 태도에 실망했으나 내색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전쟁중이고 그는 군인이다. 언제 격전지에 나가 다시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늘 웃으며 지냈으니까.
이장로님과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은 내 집 10번째인 청구동 집에 중령 한 분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간 장교가 되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으나 벌써 중령이라니! “이동휘 하사가 왔습니닷” 하고 귀티나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절도있게 경례를 부친다. 대견하고 반가웠다.
지금은 장로가 되신 이중령님, 어떻게 변했을까 자못 궁금하다.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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