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양반정신’

2005-08-2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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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성장한 곳은 참으로 순박하고 체면치레라면 재산을 다 내놓고도 아까워하지 않는 양반 마을이다.
바로 에 험~하는 헛기침 소리와 유교사상이 투철하다는 안동 의성이란 곳이다. 자고로 양반들은 탐심이 없어야 되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대추 3개로 끼니를 때우고, 길을 가다가 비를 만나도 뛰지도 않으며 체면을 유지해야 한다.
이런 곳에서 유년기를 보낸 나로서는 총과 도전과 개척정신으로 세워진 미국이란 나라에서, 또 냉철한 법망 속에서 아무 것도 없이 사업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나를 지탱해주는 게 있다면 나를 믿고 따라주는 내 마음속의 친구들이다. 인생을 살면서 진정한 벗 셋만 있어도 성공한 삶이라는데. 나는 많은 동료들을 친구 겸 선배, 혹은 아우로 생각하니 마음 든든하다. 마음속의 친구들이란 ‘생사’를 같이 하는 우리 회사 동료들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발맞추며 행진할 수 있는 동료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야말로 진정한 멜팅팟이 아닌가.
친구 좋다는 게 무엇인가? 자신의 외로움을 알아주고 함께 즐거워하며 어렵고 무거운 짐을 생색 내지 않고 말없이 대신 져주는 자가 아닌가.
“얼음이 깨지기 전까지는 누가 진짜 친구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에스키모 속담이다.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위기가 닥치면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각박한 요즘 세상에 더욱 와 닿는 표현이다.
조금만 이권이 있으면, 조금만 유리하다고 생각되면 신의는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돌아서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인가.
다행히 나는 사업을 하면서 아직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해 왔다. 이는 모든 직원과 한인들의 덕분이다.
하지만 주위에는 회사를 운영하다 곤경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위기가 닥치면 힘을 합해야 하는데 오히려 불똥이 튈까 봐 슬슬 꽁무니를 빼는 직원들을 볼 수가 있다.
이 경우 어떤 업주는 가슴속에 살생부를 만들어 이를 가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자신의 부덕을 탓하기도 한다.
나는 그 후자에 덧붙여 양반정신으로 느슨하게 친구로 만들 수 있는 관용까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것이 이민사회에서 우리 민족이 함께 살아가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처절한 사극처럼 배신하고 칼을 들이대며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흑백의 논리만 주장할 수 없는 시대가 바로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민주시대이다.
원수도 설득해서 자기편으로 만들어 함께 평화를 유지하자는 게 세계정치의 추세인데 하물며 오직 잘 살아보자는 선량한 경제인들이 힘을 합하여 친구가 되어 더불어 사는 한민족을 이루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미국에서는 이민생활 내내 변함없이 오래도록 머리를 맞댄 식구 같은 사업 파트너가 죽마고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식 문명 속에 양반정신도 변해가고 있고 유교사상은 퇴색되어 가고 있다.
변해야 산다고 하니 무턱대고 변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보이는 것이 그러한데 보이지 않는 우정은 자기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세상 보다 훨씬 오래 전 사람인 두보도 당시의 세태의 경박함을 두고 이런 글을 남겼다.
“손바닥 뒤집어 비와 구름 바꾸듯, 가벼운 세상 인정을 말해서 무엇하리. 가난할 때 관포지교 모두 알건만 요즘 사람들은 의리를 흙 같이 버리네.”


남문기
<뉴스타 부동산 대표>
(213)999-4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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