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의사의 꿈’ 키워가는 마약사범 인생역전

2005-08-2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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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출발한 ‘나눔 선교회’서 봉사하는 이지훈씨

강박관념·분노를 공부로… 1년간 평점 4.0
2년간 평점 3.5면 의대 조기입학 보장 받아

성명 이지훈. 방년 27세. 영화 ‘왕과 나’(Kind and I)의 율 브린너 뺨치는 외모에 독수리 눈매가 카리스마 그 자체. 뉴욕의 스테이튼 아일랜드 시립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하는 의대지망생. 스트레이트 A를 자랑하는 성적표. 지난 1년 평점 4.0점을 기록한 그에게 대학 측은 앞으로 2년간 평점 3.5이상만 유지하면 메디칼 스쿨에 조기입학 1순위로 받아줄 것을 약속했다. 세상에서 고마운 존재는 부모님 다음으로 선교회 식구들, 그리고 장미나 변호사. 가장 무서운 존재는 모건 스탠리 투자회사에 다니는 남동생. 그가 어둠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동안, 부모님과 자신에게 한없는 사랑과 용기를 준 동생이기에 더 무섭다. 온몸을 휘감고 있는 문신이 아무렇지 않듯이 자신의 치부를 강점으로 변화시켜 희망찬 미래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이지훈(미국명 제이슨)씨를 나눔 선교회에서 만났다.


나눔 선교회 역사상 가장 못 말리는 악동 이지훈씨가 의대 진학을 꿈꾸는 전 학점 A의 장학생이 되어 여름 방학 선교회로 자원봉사를 왔다(위). 나눔 선교회 출신인 이지훈(앞줄 오른쪽 두번째)씨가 인생의 멘토 한영호 목사(오른쪽 첫번째)와 가족처럼 아끼는 선교회 식구들을 껴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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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에 죽고 못사는 선교회 ‘나인 스트릿 브라더스’(9th Street Brothers)의 맏형으로, 한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칼날 같은 카리스마로 통한다. 가슴팍에 용 문신이 새겨져 있고 양쪽 팔뚝에는 ‘의형제’ ‘한민족’ 등 거창한 구호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나이가 제아무리 많아도, 주먹 꽤나 휘둘러도 그에게 한번 잘못 보이면 한마디로 ‘죽음’이다.
선교회 동생들을 배우로 찍은 비디오영화 ‘잭애스’(Jackass)를 연출해 부모들의 얼굴을 하얗게 질리게 만든 것도 그이고, 여자친구 때문에 새파란 나이에 인생 종칠 뻔했던 녀석이 집행유예 기간에 사귄 다른 여자친구랑 편지만 달랑 남기고 뉴욕으로 도망을 쳤던 바로 그다. 언젠가 한영호 목사가 본보 칼럼에 썼던 ‘통돼지 구이’ 사건의 주인공으로, 선교회로 들어온 다음날로 몰래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다가 경찰에 걸려 피눈물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다시 철창신세를 질 뻔했던 그 문제아. 원조 카리스마 한영호 목사에게 다이어트를 필요 없게 만든 살빠지는 존재였고, “이제 마지막으로…’라는 한 마디로 피 말리는 김영일 목사의 체벌수위를 좀더 악랄(?)하게 바꾸어 놓은 존재다.
자신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준 나눔선교회에 보탬이 되고자 자원봉사자로 찾은 날도 PK와 약속을 단단히 했다. ‘선교회 동생들에게 절대로 하드타임을 주지 않는다. 장난으로라도 괴롭히지 않는다’
여기서 잠깐 PK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PK는 김영일 목사를 부르는 별칭이다. ‘Paster Kim’이려니 짐작했더니, 전혀 다른 의미로 통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Punishing Kim’(벌주는 김목사)이다. 육체적인 힘은 하나도 가하지 않고 지능적으로 체벌을 가하는 김 목사를 두고 아이들이 붙인 별명이었다.
체벌이란 게 두 달 동안 설거지하기, 성경구절 쓰기, 밴 청소하기 등등. 그게 무슨 체벌인가 싶겠지만, 일단 해보면 장난이 아니다. 하루 세끼 80명이 먹은 그릇과 수저를 설거지한다고 상상해 보라. 밥 먹고 나면 설거지하고 설거지 끝나면 다시 밥을 먹는, 식기만 쳐다보는 육체노동이다.
그렇다고 천하의 이지훈이 군말 않고 설거지 체벌을 순순히 받아들였을까. 달갑게 받기는 했다. 미운 놈들 골라 교대로 시키고 자신은 감독을 하며 체벌을 끝내서 그렇지.
그래서 그에겐 성경구절 쓰기가 가장 괴로운 체벌이다. 성경에서 가장 길다는 시편 119장을 그대로 옮겨 쓰는 건데, 쉬지 않고 꼬박 베끼면 딱 7시간 걸리는 수작업이라고 한다.
2년 전 그가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30분 짜리 패러디영화 ‘나눔 잭애스’만 봐도 그의 과거는 짐작이 간다. 10대·20대가 열광하는 TV시리즈 ‘잭애스’(Jackass). 기괴하면서도 위험천만한 엽기행각과 상상을 초월하는 스턴트가 이들에겐 볼 만한지 몰라도 어른들에겐 TV를 끄고 싶을 만큼 역겨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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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선교회 시절 장난이든 운동이든 체벌이든 언제나 선두에 서서 대장 노릇을 했던 이지훈(맨 뒤)씨가 선교회 동생들과 말타기 놀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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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을 휘감고 있는 문신처럼 과거의 자신을 내보이는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는 이지훈씨는 “문신이 몸에 있다고 의사 채용이 안 되는 나라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TV영화가 이 정도인데, 나눔 청소년들이 직접 찍었으니 그 수위가 오죽 할까.
“부모님들께 웃음을 선사하려고 만든 영화였는데, 결과는 모두에게 겁만 잔뜩 준 셈이 됐다”고 말하는 그가 몇 장면을 공개했다.
먼저 우유를 잔뜩 마시게 하고, 와사비와 간장을 섞어서 마약을 하듯이 코로 들이마시게 한다. 이 때 와사비의 함량이 많아지면, 코 속이 뚫어질 우려가 있어 적정비율로 섞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백이면 백 모두 먹은 걸 토하게 돼있다. 또, 옷을 몽땅 벗기고 삼각팬티 하나만 입힌 채 선교회 앞의 거리를 뛰어다니게 한다. 다음은 의자에 앉혀 동여매고 계단 위에서 눈사람 굴리듯이 굴리는 것. 상상만 해도 끔직한 데 카메라에 찍힌 장면은 그야말로 살벌 그 자체. 그래도 안전장치는 확실히 했다고 한다.
이런 순악질 카리스마에게 ‘약(Drug)으로 시작하고 약(Medicine)으로 끝난다’는 인생모토가 생겼다. 인생역전도 이런 역전이 드물다. 경찰에 체포될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
그의 다혈질만큼이나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씨 하나 붙잡으려고 그날 새벽2시께 스왓팀 40여명이 출동했고 그가 머물던 아파트 상공에는 헬리콥터까지 떴다. 화려한 신고식 뒤에 ‘마약복용에 여자친구 납치’라는 죄목으로 LA카운티 구치소로 들어갔고, 다시 웨이사이드 교도소로 옮겨졌다.
교도소에서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넉 달쯤 지났을 무렵, 히스패닉과 아시안의 패싸움 비슷한 게 벌어졌는데, 의리파 독재자 이지훈이 이를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던 것. 감시 카메라가 자신을 열심히 찍어대는 것도 모르고 앞장서서 엄포를 놓았던 그는 주동자로 몰려 ‘Hole’이라고 불리는 무시무시한 방에 갇혔다. 햇빛이라곤 들어오지 않는 답답한 공간에 갇혀 있다가 2주만에 LA카운티 갱모듈로 이송됐다.
변호사가 형량이 7년으로 내려갈 것 같다고 아무리 용기를 북돋아도 1년 가까이 선고만 기다리던 그는 자포자기에 빠졌다. 직접 밝히진 않았지만 왼쪽 팔목에 50개쯤 바둑판처럼 나있는 담배로 지진 흔적(속칭 담배빵)은 그 때 생겼다. 하루가 지나가면 담배빵 하나, 또 하루 지나면 또 하나 이렇게...
이렇게 또 넉 달을 보냈을 무렵, 드디어 그의 형량에 종지부가 찍혔다. 15년형도, 7년형도 아닌, 나눔 선교회 1년형(?)이었다. 자신을 얼싸안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장미나 변호사를 보면서도 머릿속엔 딱 한가지 생각뿐이었다는 그는 변호사 옆에 중년남자 한 사람이 보이기에 대뜸 “담배 한 대만 주세요” 했다가 회초리보다 무서운 눈초리를 맞았다. 그 중년남자가 바로 자신의 운명을 쥐고있는 나눔 선교회 김영일 목사인줄 모르고 건넨 말이었다.
그 길로 지훈씨는 나눔 선교회로 입소했다. 3년 전 당시의 나눔 선교회는 80명이 포개어 잠을 자도 좁아터진 돼지우리 같은 공간이었다. 그래도 어둠에 갇혀 살았던 그였기에 눈부신 햇살을 보는 것 하나만으로 행복했고, 잘해보자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처음 며칠뿐이었다. 야간도주는 셀 수도 없고 ‘그 동안 고마웠다’고 쪽지 하나 남기고 도망가기만 3번, 마지막엔 경찰리포트가 돼 꼼짝없이 감옥행이 될 뻔했는데, 보호관찰관까지 딱 한번 봐주겠다고 기회를 주는 바람에 그는 선교회 1년형을 무사히 마쳤다. 참 기회도 많은 그다.
“최소 15년 교도소 복역 중형이 나눔 선교회 1년형으로 줄어든 걸 두고 목사님들은 사람의 힘으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고 했죠. 공판을 하면 69년형이 될지 모르니 최소한의 형량이라도 줄인 후 죄를 인정하자고 1년 가까이 케이스를 끌고 간 장미나 변호사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전 평생을 감옥에서 보냈을지도 몰라요”
의리가 강하면 보은의 정도 강한가 보다. 선교회에서 생일에, 밸런타인스 데이에 장미꽃다발을 안겨주던 장변호사가 그에겐 생명의 은인이고, 새로운 인생의 출발지 나눔 선교회가 그에게 또 하나의 집이다.
뉴욕으로 집행유예가 옮겨진 후 겨우 2년이 흘렀는데, 그의 프로필은 참으로 멋있어졌다. 개과천선이 따로 없다. 이 모든 악몽의 원천이었던 강박관념이 이젠 ‘공부’로 쏠렸다. 폭력도, 여자도, 마약도 아니라 학업에 제대로 꽂혔다.
놀만큼 놀고 보니 노는 게 지겨워 학교나 가볼까 하고 들어간 대학에서 첫 학기 ‘완전 실수’로 스트레이트 A학점을 기록하고 나니, 이젠 A학점을 받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그는 여름방학이면 나눔 선교회를 찾는 이유가 동생들에게 시작은 언제해도 절대로 늦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나눔 생활이 내 삶의 전부를 바꾼 거나 다름없어요. 제겐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과 분노조절(Anger Management)을 못하는 성격이 더욱 문제였죠. 선교회에서 생활하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깨달았고, 이젠 성질 죽이고 의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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