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잘먹고 멋지게 즐기자”실속 만발

2004-12-1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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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회 송년파티

진풍경·백태

연말연시가 다가오면 한인타운은 시끌벅적하다. 각종 단체와 동문회 송년파티가 끊이지 않아, 매 주말 저녁이면 수천 명의 인파가 타운으로 몰려든다. 부딪히는 술잔마다 이야기 보따리가 풀어지는 날이기에 술잔 비우는 재미가 남다르다. 흥청거리는 송년모임, 술에 찌든 망년회란 옛말. 드레스 코드가 요구되는 멋스런 파티가 대부분이다.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 속에 호텔 연회석에 앉아 축배의 잔을 나누는 게 한인타운의 세밑 풍경이다. 송년파티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12월의 첫째 주말, 윌셔그랜드 호텔에서 열린 경기고 총동문회(회장 전신영)의 ‘5인조 밴드와 함께 하는 흥겨운 댄스 파티’와 성균관대 총동문회(회장 김주인)의 ‘학창시절의 향수를 만끽하는 타임머신 파티’를 찾아 동문회 송년파티의 진풍경을 담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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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동문회 송년파티에 참석한 동문들이 즉석 패션쇼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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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타운의 송년모임은 잔뜩 먹고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는 술파티보다는 적당히 마시고 스트레스를 푸는 파티문화로 확산되고 있다. 경기고 총동문회 송년파티에 참석한 동문들이 축배를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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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가를 제창하며 학창시절의 추억에 젖어드는 성균관대 총동문회의 타임머신 파티.


술잔대신 선후배 부부댄스 - 즉석 패션쇼도

환갑동문 부부에 전통 혼례식 기념 촬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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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을 맞은 경기고 59회 동문 권오일씨 부부가 신랑각시로 분장해 기념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특끼’ 펼친 스타 동문에 주눅든 나홀로족 “내년엔 나도”


왼쪽은 경기고, 오른쪽은 성균관대입니다”
토요일 오후6시 윌셔그랜드 호텔 2층. 우아한 정장차림의 부부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혼잡을 피하기 위해 한 사람이 입구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은근히 오른쪽을 강조하는 힘찬 목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성균관대 총동문회가 주최하는 송년모임 행사장.
꾸역꾸역 모여드는 동문들로 행사장은 이미 꽉 찬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출석 성적이 양호한 편. 총무를 맡은 82학번 한상형씨는 “예년에는 동문 선배가 운영하던 한인타운의 호텔에서 송년파티를 개최해오다가, 올해는 타운을 벗어나 보자는 데 의견이 모아져 이 곳으로 장소를 옮겼는데 반응이 좋다”고 말한다.
장소를 예약하면서 120명 참석을 장담했는데, 모여든 동문들이 족히 150명은 넘어 보이니,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송년모임 유치에 총력을 기울인 행사준비위원으로서 신이 날 수 밖에. 사실상 송년파티는 장소가 한번 정해지면 여간해서 바꾸기가 힘들다. 모두가 12월 주말에 송년모임 개최를 원하기 때문에 일년 전에 예약을 완료하지 않으면 큰 방(?) 잡기란 불가능하다.
이렇게 파티 규모를 키우다 보니 올해 송년모임에 소요된 비용은 줄잡아 2만 달러.
샐러드로부터 스테이크와 생선, 과일 푸딩 디저트와 커피까지 1인당 60달러의 풀 코스가 서브되는 저녁식사에다가, 동문회가 별도로 와인을 구입해 테이블마다 2병씩 놓았다. 물론 와인으론 어림없는 주당들을 배려해 한 구석에 유료 바(bar)를 마련, 갖가지 술을 골라 마실 수 있게 준비했다.
방명록을 들여다보니 54학번부터 99학번까지 참석한 동문들의 연령층도 다양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70년대 이전 학번들은 부부동반으로 참석하고 그 이후 학번은 외기러기처럼 혼자 오는 경향이 짙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왜 혼자 왔냐고 묻는 이는 없다.
대학 동문회의 경우 나홀로족 일수록 동문회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편으로 아내가 혹은 남편이 가지 말라고 말려도 몰래 빠져 나오는 극성동문이기 때문이다.
70년대 학번이 회장단을 구성하는 동문회 모임에서 80년대 이후 학번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지만, 한복 차림의 단아한 자태가 유난히 눈에 띄는 성대의 명창 96학번 남은영씨 정도 되면 숨소리를 크게 내고 목소리가 조금 높아져도 선배들로부터 귀염을 받는다.

시계바늘이 7시를 넘어서자, 정기총회에 앞서 모교의 발전상을 담은 15분 짜리 동영상이 상영됐다. 불이 꺼지면서 다소 엄숙해진 분위기를 틈타 경기고 총동문회 송년모임 행사장으로 살짝 빠져 나왔다. 그런데 두 행사장을 왔다갔다하는 건 기자 혼자만이 아닌 듯 했다. 경기고와 성대를 모두 졸업한 이원준(78회)씨도 운좋게 같은 호텔에서 열리는 고교와 대학 송년모임에 더블을 뛰고 있었다.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라 쓰인 깃발을 따라 경기고 총동문회 행사장에 들어서니, 병풍이 쳐져있는 포토 스튜디오가 단박 눈에 띈다. 폐백실도 아닌데 병풍을 세워둔 이유가 뭘까 궁금해질 무렵,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쓴 신랑각시가 등장했다. 올해 환갑을 맞은 59회 동문 권오일씨 부부였다. 새색시처럼 곱게 차려입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신부와 나란히 서서 플래시 세례를 받는 신랑 권오일씨의 입이 귀에 걸려있다. 나이가 들어도 혼례는 혼례인가 보다.
해마다 경기고 송년모임에서 빠지지 않는 프로그램이 그 해 환갑을 맞은 동문을 위한 생일 파티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아름다운 전통이기에 환갑 맞은 동문들은 만사를 제쳐두고 동문회 송년파티에 참석한다. 기념촬영은 물론 동문회가 준비한 60개의 초가 장식된 커다란 케익으로 생일 축하를 받는 자리인데 빠지면 자기만 손해 아닌가.
100년이 넘는 연혁을 자랑하는 경기고 남가주 모임에는 45회부터 85회까지 40년 터울이 어울려 파티를 벌이므로, 새까만 후배는 어딜 가나 기를 펴지 못한다. 차라리 안내 데스크에 앉는 편이 수고한다는 인사 치레라도 받는다.
올해 경기고 송년파티는 1.5세 전신영씨가 회장을 맡아서인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미국스러운(?) 게 특징. 전회장은 “인터넷을 뒤져 5인조 라이브밴드 ‘솔 스톤(Soul Stone)’을 초청, 선후배들의 춤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무도회장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2004년 경기고 송년모임의 테마는 ‘댄스·댄스·댄스’. 고고, 디스코, 로큰롤, 리듬 앤 블루스, 그리고 스윙까지 후끈후끈한 댄스 파티가 장장 3시간 가량 계속될 예정이라고 했다.
분위기가 채 무르익기도 전에 64회 권국원씨 부부가 보기만 해도 그림 같은 볼룸 댄스로 스테이지를 장악한다. 행사장 입구에서부터 여성미가 물씬 풍기는 연한 핑크드레스에 모피 코트를 두른 부인을 에스코트해 눈길을 끈 바로 그 동문이었다. 화려한 의상으로 보나 서로 끌고 당기는 춤 실력으로 보나 사교파티의 진수를 보여준 커플이다.
한국에서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멋모르고 혼자 참석했다는 78회 강병선씨는 “무늬만 부부동반인 한국의 동문회 모임과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며 “내년에는 나도 볼룸 댄스를 배워 반드시 아내랑 와야겠다”고 말한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진행된 2부 행사는 경기고 모임의 단골 사회자 임문일씨가 맡았다. 걸죽한 입담을 자랑하는 중견 사회자이지만, 대선배들이 지켜보는 모교의 송년모임은 다소 부담스러운 듯 ‘수준 있는’ 농담을 늘어놓았고, 사회자가 꽃이 되어 모두가 함께 하는 시간보다는 오랜만에 만난 동문끼리 삼삼오오 정담을 나누는 분위기를 조성해갔다.
신나는 댄스 음악을 뒤로하고 다시 성균관대 행사장으로 이동하니,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80학번 김재범씨의 사회로 동문들의 즉석 패션쇼가 한창이다. 알쏭달쏭 퀴즈 게임으로 시작돼 패션쇼, 댄스경연대회로 이어진 2부 행사는 상품이 걸린 만큼 선배도 후배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신세대 그룹 왁스의 흥겨운 곡에 맞춰 인대가 끊어질 듯 허리와 다리를 흔들어대는 88학번의 신들린 춤에 모두들 넋이 나가버렸다.
마지막으로 송년파티의 하이라이트인 경품 추첨 순서. 동문회 입장에선 회비로 충당되지 않는 금액을 경품 티켓 판매로 메울 수 있고, 모임 참석자들은 뜻밖의 행운을 꿈꾸는 순간이다.
물론 상품도 푸짐하다. 해마다 성대 송년모임에는 여자 동문들의 참여를 유혹하듯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상품으로 나온다. 경품 기기도 사람을 알아보는지 올해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60학번 임태랑씨 아내의 목에 걸렸다.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내의 모습에 로젠 노래방 주인인 임씨가 2차를 쏘았음을 물론이다.
다이아몬드에 눈이 멀어 경기고 송년모임 경품 추첨을 직접 보지 못했는데, 후문으로 성민경씨가 42인치 플라즈마TV를 비롯해 크고 작은 경품을 싹쓸이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전날 돼지꿈이라도 꾸었는지 궁금해 물어보니, 티켓 구입에 자그마치 600달러를 투자했다고 한다. 120장의 티켓을 손에 쥐고 있었으니 번호 찾기도 쉽지 않았을 것. 400달러 대 경품은 몽땅 타가게 되니 떳떳하게 경품에 당첨되고도 하나 정도는 반납해야할 분위기로 흘러 결국 성씨는 진홍삼 세트를 다시 내놓았다. 뭐든지 투자를 크게 해야 이익이 따르나 보다.

<하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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