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족과 관계 이야기 며느리도 인간이다

2004-12-11 (토)
크게 작게
30대 초의 최씨는 대학원 졸업 후, 바로 결혼하여 맞벌이 생활하며 두 살배기 딸을 키우면서 정신없이 지내왔다. 남편의 학력이 낮다면서 친정에서 결혼을 반대했지만 다행히도 딸의 귀염성 있는 행동들로 인해 친정식구들과의 관계는 약간 호전되었다. 하지만, 최씨의 남편은 직장생활을 진득하게 하지 못하고 자주 직장을 바꿔왔다.
몇달 전 남편이 상사와 충돌이 있어서 해고를 당했다. 시아버지의 명령 하에 남편이 시아버지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최씨 부부는 주말이면 늘 시댁에 불려가서 이런 저런 집안 일을 처리했다. 시동생은 바쁘다며 좀처럼 집에 붙어 있지 않았다. 결혼한 시누이는 출가외인이라며 한번도 들러보지도 않고 아예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다. 시어머니는 건강을 이유로 밑반찬부터 시작하여 집 안팎의 모든 일을 최씨 부부에게 넘겼다.
시아버지는 막무가내로 최씨를 나무라고, 아들이 직장생활을 변변하게 하지 못하는 것 또한 최씨의 책임이라며 추궁했다. 또한 주위 친구들은 자식 덕으로 일 년에 적어도 한번은 해외 여행을 하는데 며느리가 살림을 못해서 해외여행 한 번 보내주지 않는다고 생일이나 명절이 다가오면 성화가 더욱 더 심해진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친정에서 도울 수 있지 않느냐”라는 언질 또한 있었다.
생일이나 명절이면 장남인 최씨네 집에서 가족식사를 해왔다. 열 명이 넘는 식구들의 식사 준비며, 설거지며, 이것저것 혼자서 하고 나면 일주일 동안 몸살을 앓거나 하루 이틀 병가를 내야 했다. 시집식구들은 최씨 집에 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모두들 최씨 부부의 대접받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생일이나 명절에 과일 하나도 안 들고 빈손으로 오는 시집 식구들을 계속 대접하고, 많은 설거지를 혼자 낑낑대면서 며느리는 도대체 식모인가 하인인가 의구심이 생겼다.
화가 치솟아 오르고, 답답하고, 억울하기가 그지없다. 어려움을 친정에 호소할라치면 그러기에 왜 직장도 변변찮고, 학력도 변변찮고, 미래 또한 변변찮을 사람과 결혼했느냐고 일축을 당한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나 혼자 참고 희생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버텨 온지 벌써 몇 년이다.
최근 친구의 권유로 ‘분노방’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최씨는 자신의 내부에 화가 잔뜩 들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제까지 살아온 것을 깨달았다. 화병을 이제껏 내부에 키워오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이제는 화를 적절하게 표현하면서 살고 싶다. 때론 “며느리도 감정이 있는 인간이다”라고 외치고 싶다. 지난 30년간 한번도 제대로 화를 내어본 적이 없었던 최씨는 ‘분노의 인식과 그 표현’에서 이제 막 걸음마를 떼었다.

이 은 희
<결혼가족상담전문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