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 성 칼 럼 세상사는 이야기

2004-12-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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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밥

한때 나는 을지로에서 신촌까지 매일 걸어서 등교해야 했다. 을지로 2가 길에서 좁은 골목을 몇 발짝 들어서면 자그마한 2층 적산가옥이 있었는데 당시 38선을 넘어온 여대생 10여명이 그 집에서 합숙을 하고 있었다.
시청에서 정해준 건물이라 공짜였고 미국 구호식량을 배급받아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으니 그런 대로 생존하는데 지장은 없었으나 늘 어찌나 배고프던지…
구호식량은 우리네 식생활하고는 동떨어진 통밀과 핀토빈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재주껏 익혀 위주머니를 챙겨야 했는데 식사 당번이 두 가지 곡식을 밥솥에 쏟아 넣고 물을 부은 후 타는 냄새가 날 때까지 불을 지핀다.
뚜껑을 열어보고 하얀 핀토빈이 어느 정도 익은 듯하면 불을 끄고 모래알 같이 우르르 흩어지는 것을 ‘밥’이랍시고 한 공기씩 담아놓고, 더운물에다 간장을 탄 멀건 국물 한 공기를 곁들여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각자 자기 학교로 향한다.
을지로 2가에서 을지로 입구 시청 앞을 돌아 광화문, 서소문, 서대문, 북아현동을 지나 이대 뒷산을 타고 고개를 넘으면 후유 한숨이 나오고 벌써 시장기가 밀려온다. 오전 강의가 끝나고 다들 도시락을 즐기는 시간이 되면 나는 물 한 모금 마시고 슬그머니 뒷산으로 피한다.
노송이 우거지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저귀는 나만의 동산에서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시 구절도 암송하고 길게 드러누워 “나는 왜 이곳에서 허기진 배를 안고 이 고생을 견뎌야 하나? 서른 살이 됐을 때 내 모습은 어떤 것일까…”
오후 수업이 끝나면 물을 마시고 아침에 걷던 길을 반대로 걷기 시작한다. 광화문까지 오면 조선일보에 들러 게시판에 붙은 그날 신문을 첫 머리에서부터 끝까지 모조리 읽은 다음 넓은 광화문 길을 건너 ‘동아일보’의 게시판에 붙어 서서 한 줄도 놓칠세라 읽어 내려 간다.
그 다음에는 ‘서울신문’ 그렇게 하고 있노라면 어둑어둑해진다. 빨리 돌아가도 배만 고플 뿐 반겨줄 사람도 없는 처지 아닌가?
나는 그 때 무척 지쳐 있었다. 이 모진 고생 끝에 내가 얻어지는 게 무엇일까? 차라리 학교를 쉬고 취직을 할까? 일자리는 얻을 수가 있을까? 생각이 이에 미치자 모교의 최 선생 얼굴이 떠올랐다.
여고의 대선배인 최 선생은 동경 유학에서 돌아와 모교의 ‘가사’선생으로 계셨다. 해방이 되자 결혼을 하고 서울에 올라와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있던 터라 혹 일자리 얻는데 도움이 될까싶어 댁으로 찾아갔다.
앞치마를 얌전히 두르고 나를 맞는 최 선생은 한 마디로 행복한 새댁 그 자체였다.
나는 도저히 배가 고파 학교를 쉬겠다는 따위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어서 우물쭈물 하다가 “그림을 해 보니까 자신이 없어서 좀 쉬면서 생각해 보고 싶다”고 둘러댔다. 최 선생은 남의 속도 모르고 “해낼 수 있을 거야. 힘내요”라며 격려해 주신다.
그럭저럭 저녁때가 되어 신혼생활인데 방해가 돼선 안 되지 싶어 일어섰다. 저녁을 먹고 가라고 말리셨으나 나는 현관에 나와 신을 신었다.
최 선생은 얼른 부엌으로 가시더니 큼직한 김밥을 말아 가지고 나타났다. “어둑어둑해졌으니 남이 주의해 보지 않을 거야. 걸어가면서 먹어도…”
김밥을 받아 든 나는 목이 메어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쫓기듯 문을 나섰다. “내가 이렇게 배가 고픈 것을 선생님은 눈치 채셨구나!”
청구동에서 문화동, 을지로 7가, 6가, 5가… 까맣게 윤기 흐르는 빳빳한 김에 싸여있는 하얀 이밥. 한 입 베어 물고는 천천히 씹으며 흐르는 눈물과 함께 삼키고, 또 베어 물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천천히 씹고… 4가 네거리쯤에 왔을 때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엉엉 소리내어 울면서 눈물에 젖어 범벅이 돼버린 마지막 한 톨까지 입에 넣고 천천히, 천천히 씹으며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를 계속하자. 나는 해낼 수 있다!”
사람의 인연이란 묘한 것이어서 나는 그 날의 눈물 젖은 김밥과는 상관없이 최 선생의 이종사촌(어머님끼리 자매) 동생과 결혼하여 그가 갈 때까지의 50년 세월을 후회 없이 함께 살았다.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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