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4-12-0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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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땡스기빙 세일

추수감사절 다음날 미전국적으로 실시되는 ‘애프터 땡스기빙 세일’의 매출이 올해 크게 늘었다고 신문들이 보도하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우리 친구, 가족들의 샤핑도 한 몫 단단히 했음을 나도 보도해야겠다.
땡스기빙 데이 연휴가 있던 지난 주 서울에서 친구 가족이 방문하였다. 20년전 마지막으로 보고 소식이 끊겼던 대학 친구인데 다시 연락이 되어 이곳에 있는 두 친구, 나와 티나를 찾아온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반갑고 기쁜 나머지, 세 집 식구들이 다같이 샤핑을 함으로써 이 기쁨을 더 풍성히 나누기로 하였다.
팜스프링스 인근의 ‘카바존’ 아울렛을 목표로 우리가 만난 시각은 금요일 새벽 6시, 처음엔 샤핑하자고 꼭두새벽부터 설치는 우리가 너무 심한게 아닐까 하여 조금 창피한 생각도 들었으나 절대 그런 것이 아님이 곧 판명되었다. 프리웨이 내리는 데서부터 차가 밀리고 여기저기 경찰들이 보이기에 사고라도 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엄청난 차량 물결이 아울렛으로, 아울렛으로 밀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각, 그 넓은 파킹랏에 단 한 대의 주차공간도 남아있지 않았고 황량한 주변 도로들은 줄지어 파킹하는 차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우리는 갑자기 놀라고 급한 마음이 되어 머나먼 골목길에 간신히 주차하고는 잰걸음으로 아울렛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벌써 샤핑백을 잔뜩 든 인파가 바삐 오가는 모습을 보는 순간, 샤핑도 시작하기 전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며 맥부터 빠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밀려다니는 인파의 90% 이상이 동양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정신없이 샤핑하는 그 모든 사람들이 한국사람, 중국사람, 베트남계, 일본계 등 아시안인 것에 우리 모두는 놀라고 또 놀랐다. 왜 아울렛에 아시안이 이렇게 많을까? 그 의문은 곧 풀렸다.
디올(Dior), 구찌(Gucci), 알마니(Giorgio Armani), 페라가모(Ferragamo), 코치(Coach), 타즈(Tod’s) 등 명품 매장마다 입구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밀려드는 샤핑객을 통제하기 위해 스토어에서 몇명씩 들여보내는 동안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미국 아울렛의 명품 매장은 마치 동양인들을 위해 지어진 것처럼 노란 얼굴들이 물건을 싹쓸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인을 비롯한 아시안들의 샤핑 매너가 빵점이라는 사실, 창피한 줄 알아야겠다. 아침시간인데도 스토어마다 어질어진 옷들과 포장 벗겨진 물건들로 매장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한없이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는 여자 화장실은 바닥과 쓰레기통이 휴지범벅이었으며, 샤핑 태도 또한 극성스럽고 뻔뻔하여서 대부분 백인여성들인 상점 직원들 앞에서 부끄럽게 느껴졌다.
한편 나는 이날 초조하고 불안하며 마음만 급해서 왔다갔다하는, 매우 비생산적인 한나절을 보냈다. 가는 곳마다 계산대에 줄이 너무 길어서 물건을 고르기도 전에 질려버렸고, 좋은 물건은 이미 다 팔린 것 같아서 억울하였으며, 지금이라도 빨리 서둘지 않으면 그나마도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초조했고, 남들이 이것저것 집는 것을 보면 내 것이 줄어드는 것처럼 불안하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과연 얼마나 필요한 것들이었을까? 나중에 집에 돌아와 생각하니 거기 가지 않았다면 하나도 살 생각도 없고 평소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놓고 허둥대었던 것이다. 싸다고 하면 필요 없는 물건도 자꾸 사게되는 샤핑의 허상, 바로 그것이었다.
게다가 뿔뿔이 흩어진 친구들과 가족들을 찾느라 쉬지 않고 전화를 하면서 이리저리 좇아다녀 발바닥은 불이 난 것만 같았다. 너무 지치기도 했고 가는 곳마다 줄이 한없이 길어 샤핑 의욕을 잃어버린 우리는 일찌감치 샤핑을 끝내고 한 자리에 모여 결산을 하였다.
티나의 남편은 알마니 수트를 4분의 1가격에 샀다고 했다. 나의 남편은 칼빈 클라인 가죽자켓을 100달러 싼 가격에 구입했고, 나는 청바지와 청자켓 한 벌을 싸게 샀으며, 아들은 요즘 유행이라는 ‘빌라봉’ 스웨셔츠를, 티나는 알마니 바지와 부엌용품들, 서울서 온 친구는 딸과 아들이 오만가지 패션 품목을 잔뜩 샀다고 자랑했다.
새벽부터 설친데 비하면 대단한 수확은 아니었지만 애프터 땡스기빙 세일 첫날 새벽에 오지 않았더라면 건지지 못했을 물건들이라고, 서로를 위로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날의 샤핑 호들갑을 정당화하였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다시는 이런 날 샤핑에 나서지 않으리라, 다짐에 다짐을 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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