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4-11-2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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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클래스

지난 주 제인 장씨의 CPCS 요리학교에서 와인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평소 말이 많지 않지만 와인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반짝이며 한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데, 어느날 거기에 주목한 제인 장씨가 차라리 강의를 한번 해달라고 요청해온 것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준비에 좀 신경을 썼고, 강의하는 날은 휴가를 내어 한시간 반 열강하였다. 이번에 처음 알게된 사실이지만 나는 좋은 선생이었다. 학생들은 강의시간 내내 모두 한눈 한번 안 팔고 경청하였으며, 강의 중 질문이 쉬지 않고 나왔고, 끝난 뒤에는 모두들 유익한 시간이었다며 고마워하는 바람에 나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내가 와인에 대해 잘 가르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 어떤 분야의 전문가들은 너무 많이 알아서, 너무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전문가는 아니지만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 더 잘 가르칠 수 있다고 본다.
이날도 나는 이론과 격식을 가르치기보다 자연스럽게 와인의 기초를 이해하도록, 그리하여 어디 가서 무슨 와인을 마시게되어도 기본적인 이해를 갖고 맛을 감상하도록 설명하려고 애썼다.
강의도중 한 학생이 ‘왜 와인 잔은 다리(stem)를 잡아야하느냐’고 질문했다. 어느 모임에서 글래스 윗부분을 잡았더니 거기 잡는거 아니라고 핀잔을 주더란다. 이런게 잘못된 것이다. 어디를 잡으면 어떤가, 맛있게 마시면 되는 것을…
잔의 다리를 잡는 이유는 와인의 온도가 손의 체온에 의해 영향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리즐링이나 샤도네 같은 백포도주와, 보졸레 누보나 피노 누아 같이 가벼운 적포도주는 차게 마셔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데, 손바닥으로 잔을 감싸다보면 체온으로 인해 더워질 수 있기 때문에 다리를 잡는 것이다. 또 와인을 마실 때는 잔을 들어 색을 보거나 잔을 돌려 향기를 자주 맡는데 잔을 쉽게 돌리려면 당연히 다리를 잡게 되어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온도 차이로 발생하는 미묘한 와인 맛의 차이를 아직 모르는 사람, 또 잔을 돌려 향기 맡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포도주의 맛을 가르치지는 않고 어디를 잡는 것부터 지적하며 무안을 주는 일이 합당한 일인가?
또 한사람은 “나는 멀로가 맛있는데 주위의 와인 마시는 사람들이 모두들 카버네 소비뇽을 마시면서 내가 뭘 모른다고 무시한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 역시 참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이 모두 다른데 어떻게 다같이 똑같은 맛을 좋아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정기적으로 와인을 함께 마시는 친구들이 있는데 똑같은 와인을 다같이 마셔도 모두들 조금씩 다르게 맛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와인에는 짠맛이 전혀 없는데도 짜게 느껴진다고 우기는 친구마저 있는 형편이다. 그래도 우리는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람의 입맛이란 매우 주관적인데다 와인은 방금 전에 먹은 음식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지고 그 사람의 상태, 함께 마시는 사람, 당시의 분위기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매우 신비스런 음료다. 똑같은 와인을 여러병 사다놓고 각자 다른 날 한병씩 따서 마셔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뭐든지 내용은 접어두고 형식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내용이 부실하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면 더 그러는데, 눈에 보이는 매너부터 잘 지키는 것이 잘난체 하기 쉽기 때문인 것 같다. 또 너무 남을 의식하다보니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와인을 마시는 것은 유행을 좇거나, 멋있어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고, 즐기기 위한 것이다. 매너와 법칙이 많은 것 같아서 어려워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친해지고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도 친해지려면 자꾸 만나야하듯, 와인도 이것저것 마셔보면 재미가 붙고 호기심이 생기면서 더 쉽게 친해질 수 있다. 남들이 뭐라든 내가 맛있는 와인을 맛있다 하고, 내가 좋은 것을 좋다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와인클래스 강의를 하고 왔다고 자랑하자, 몇몇 친구가 사람을 모을테니 좀 해달라고 하고, 남편도 자기네 그룹 모일 때 한번 해줄 수 있냐고 청탁이 들어온다. 아무래도 올 연말엔 아마추어 와인 출강이 잦아질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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