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 성 칼 럼- 세상사는 이야기

2004-11-2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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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위로 뜨는 참외 같은 사람

며칠 전 한국어 방송을 시청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일상에서의 상식이나 지식 등을 모아서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교양오락 프로그램의 일종인데, 그 날의 첫 번째 명제는 ‘참외는 물에 뜨는 것만 먹을 수 있다’였다.
참외는 밭에서 수확하자마자 물에 띄워 물위로 뜨는 것만 판매한다고 한다.
물에 뜨는 참외는 당도가 높고 과육이 단단해 맛있는 반면 물에 가라앉는 참외는 씨가 곯아 물이 생겨 막걸리 같은 냄새가 나 먹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마켓에서 사먹는 참외는 이런 과정을 거쳐 합격한 것들이기 때문에 단맛이 좀 덜한 것은 있어도 곯은 참외를 먹을 기회는 거의 없는 셈이다.
실험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순서. 비닐하우스에서 금방 딴 참외 한 광주리를 물에 쏟아 넣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4~5개의 참외가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가라앉은 참외 하나를 실험자가 맛을 보았다.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도로 뱉어내고 만다. 단맛 대신 시큼한 알콜 냄새와 맛이 난다며 도저히 먹을 수 없다고 말한다. “먹어서는 안되며 먹게 되면 탈이 난다”고 참외밭 주인이 한 마디 거든다.
클로즈업 된 화면에서 참외들은 겉모양으로 볼 때에는 탐스러운 노란 빛깔에 모양도 반듯하니 모두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속으로 곯은 것이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할 만큼.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참외 속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참외에게는 애초에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는 확실한 방법이 있지만 어디 사람은 그렇던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외모상의 뚜렷한 차이점을 분별할 수는 있어도, 참외처럼 ‘될 사람과 안 될 사람’으로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오랜 시간을 지켜보고 겪어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요, 그 사람의 내면인 것을.
실험에서 탈락한 참외들은 상품가치가 없으므로 여지없이 버려졌지만, 사람의 가치는 쉽게 판단할 수도 없고 스스로를 교육하고 수양하고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노력 여하에 따라 점차적으로 차이가 나고 또한 죽는 순간까지 변화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은 쉽게 포기되고 버려지는 존재가 아니니까 자신도 남도 귀히 여기고 다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부터 불었던 웰빙(well-being) 바람이 해가 바뀌고 또 바뀌려고 하는데도 식을 줄을 모른다.
먹거리나 의류, 스포츠, 가구, 집을 뛰어넘어 연예인이나 일반인들의 누드화보 에도 웰빙 컨셉트를 이용하고 있다. 자연 친화적인 이미지에 고급스러움을 더해 웰빙을 우려먹는 것 같다.
일부에서는 진정한 웰빙의 의미가 왜곡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육체의 건강뿐 아니라 정신을, 내면세계를 잘 가꾸고 평안하게 유지하는 것이 진정한 웰빙이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보이지는 않아도 부지불식중에 향기를 뿜어내는 우리들의 내면을 매일매일 닦아주고 가꾸어 가는 것은 더 열심을 내야 할 일인 것 같다. 올바른 정신이 깃들이지 않은 보기 좋은 외모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영 쓸모가 없는 참외 같을 것 같으니까.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 보면 생각보다 의외로 단맛이 많이 나는 사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단맛을 느끼게 되는 사람, 처음의 인상보다 쓴맛이 숨어있는 사람, 자꾸만 멀리하고 싶 은 사람 등등이 생겨나게 된다.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참외 같은 사람인가? 물 속에 들어가자마자 맥없이 가라앉아 버리는 참외처럼 단맛도 없고 신 냄새나 풍기는 건 아닐까? 잠자리에 들어서도 자꾸만 ‘물위로 뜨는 참외’ ‘가라앉는 참외’의 모습과 그것들의 극명한 운명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 는다.

성영라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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