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족과 관계 이야기

2004-11-1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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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통과 사랑이야기

박씨 부부는 최근에 소위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다. 집 장만 후 모든 문제가 사라지고 늘 행복할 줄만 알았던 박씨 부부는 이사를 한뒤 일주일이 멀다하고 다투기 시작했다.
상담과정 중 박씨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그 중 하나가 쓰레기통이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쓰레기통을 내어놓는 일은 단독주택에 이사온 후로 추가로 생긴 일이었다. 박씨가 하기에는 쓰레기통의 덩치가 크고 무거웠다. 또한 미국 생활문화에서 쓰레기통은 남자들의 영역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남편이 쓰레기통 일을 흔쾌히 맡았다.
그런데 책임을 맡은 남편은 쓰레기통 내놓는 일에 전혀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박씨 부부는 쓰레기통을 내놓아야 하는 밤마다, 또 쓰레기통을 들여놓아야 하는 밤마다 다투게 되었다. 이웃 집 쓰레기통은 다들 집으로 들어갔는데 박씨네 쓰레기통만 덩그러니 길밖에 나와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박씨는 화가 불끈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박씨의 분노의 원인과 유래를 상담 중 그녀의 성장과정을 다루게 되었다. 박씨가 어렸을 적, 한국 생활문화에서 쓰레기 버리는 것은 가정주부의 영역이었다. 어머니가 안 계셨기에 온갖 집안 일은 박씨의 책임이었다. 쓰레기 버리는 일은 물론이었다. 미국생활을 박씨가 즐기는 점 중의 하나는 연탄재 날리는 골목길에서 쓰레기 비우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쓰레기 버리는 일로 남편과 마찰이 생기면서 어린 시절 추억과 상처가 범벅이 되어 다시 살아난 것이다. 박씨가 쓰레기통을 직접 내놓고 들여놓으려고 시도하지 않은 바가 아니었다. 쓰레기통이 크고 무거운 점 외에도 자신이 한없이 처량해지고 옛날 어렵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쓰레기통 임무를 소홀히 하는 것 같은 남편에게로 분노의 화살은 늘 향하게 되었다.
매주일 싸우기를 몇 달, 박씨는 자신의 잦은 분노에 스스로 지치면서 문제의 해결점을 찾고자 상담에 열심히 임하였다. 이제 박씨는 남편에게 쓰레기통을 내어놓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쓰레기통이 덩그러니 길가에 외롭게 서있어도 예전처럼 분노가 솟아오르지 않고 남편에게 화를 쏟아 붓지도 않는다. 그저 옛 기억을 되살리면서 “이번 주에 쓰레기통을 내어놓지 않았으면 다음 주에 하고, 오늘밤에 들여놓지 않으면 하룻밤 더 밖에서 재우면 되고 … 나는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않을 거야”라고 되새긴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쓰레기통이 밖에 내놓아져 있었다. 박씨는 길밖에 내놓아져있는 쓰레기통을 보면서 남편의 사랑을 한없이 느낄 수 있었다. 상담과정 중 배운 ‘나 문장’을 사용하여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달했다. “밖에 내놓아져 있는 쓰레기통을 보면서 나는 너무나 행복하고 당신의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어요”라고 말이다.

이 은 희
<결혼가족상담전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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