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사는 이야기

2004-11-0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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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며

흑백사진 1장이 손에 잡힌다. 까만 치마에 흰색으로 보이는 저고리는 배꼽까지 덮고 있다. 그래! 그땐 저고리 길이가 엄청 내려오는 것이 유행이었지...
나를 중심으로 양켠에 나란히 선 남성들은 중국의 쟁쟁한 대가들이다. 마수화, 황군벽, 장곡년 그리고 젊은 화가 황가천… 기타 이름들은 나의 기억 밖으로 사라졌다. 그렇다. 44년이나 옛날일 아닌가?
1960년 4·19가 일어난 해 가을이었다. 미술협회에서 공문이 왔는데 ‘동남아 미술 사절단’이 가게 되어 5명이 추천되었는데 그 중 한사람으로 뽑혔으니 나와 보라는 것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사절단이란 무엇일까? 무슨 일로 어떤 나라들을 돌 것이며 일행은 누구누구일까? 그리고 비용은 어떻게 되며, 더욱 궁금한 것은 하필이면 왜 내가 걸렸을까? 미협 간부도 아니요 30세를 몇 해 넘겼을 뿐인 평회원에 불과했으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다음날 미협 사무실에 나가 내용을 듣고 보니 못 가겠다는 말이 안 나왔다.
“5명 중 여성회원 1명을 넣기로 했는데 천경자 선생이 사정이 있어 못 가겠다고 하니 김 선생이 가줘야 하겠어”
12월 중순, 그때만 해도 여권을 받고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미술계로서는 큰 사건이었으므로 많은 화가들의 전송을 받으며 김포공항을 떠났다.
첫 방문지는 당시 자유중국이라 불리던 대만이었다. 대북 공항에 내려 트랩에 발을 내디디자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아마 할리웃 스타도 함께 탔었나보다”하며 내려다보니 그 많은 카메라 앵글들이 모두 우리 일행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아침 조간신문들은 제1면에 우리들 사진으로 도배를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에 쓸만한 인물이 별로 없었으매 대타로 나섰던 그 여행에서 내가 어려웠던 것은 레이디-퍼스트를 연출하는 일이었다. 다른 분들보다 언제나 미리 준비를 하고, 다소곳하고 의젓한 모습으로 앞서서 나가야하니 계속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우리끼리 나설 때에는 한국에서 하던 대로 남성들이 먼저 들어서고 도어를 확 놓아 버리면 쫓아 들어가는 나의 이마를 보기 좋게 후려치니 얼마나 아팠는지. 그래도 나는 번번이 웃으면서 뒤따라야 했다. 모르고 하는 일이니 어쩌겠는가?
하루는 큰 극장 같은 곳으로 안내하더니 한참을 기다리게 했다. 이윽고 안쪽으로부터 새하얀 얼굴 바탕에 진홍색 립스틱이 돋보이는 여성이 긴 까만 코트를 입고 다가왔다. 그분이 바로 장개석 총통의 부인인 송미령 여사였다. 그때 64세라 했는데 그렇게 짙은 화장을 했어도 얼마나 고상하게 보이던지.
한 사람씩 나서서 악수를 했는데 돌아오는 차 속에서 “이 손을 씻으면 안 되는데 어쩐다지?” 하며 껄껄 웃으신 분은 아마 4개 국어에 능통한 청강 선생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얼마전 송미령 여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듣고 1960년 12월에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한동안 멍하니 벽을 보고 앉아있었다.
‘동남아 미술사절단’의 목적은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는 미술인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아시아의 미술발전을 놓고 회담도 하며 친선을 도모한다는 취지였는데, 많은 작품들을 챙겨 여러 나라를 돌며 벽에 걸고, 떼고, 사람에 시달리고 고생이 말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거의 잊었다.
그러나 한가지, 대만에서 끼니마다 정중히 대접받던 별미 중화요리의 맛은 아직도 못 잊고 있다.
그 날은 특별한 만찬이 있었다. 요리접시가 계속 들어오는데 24가지였다고 들었다. 맨 마지막에 넓은 원탁에 꽉 차는 큰그릇에 허물을 벗은 돼지 한 마리가 누워있었고 쥐새끼 같은 것들이 곁들여져 있는 신기하고 끔찍한 요리가 나왔다.
설명인 즉, 새끼를 가진 어미돼지와 그 뱃속에 들었던 새끼들을 요리한 것이라고. 옆자리의 그 나라 고관은 “아주 귀한 요리이며 맛이 일품”이라며 자꾸만 권했지만 나는 도저히 젓가락을 댈 수가 없었다.
어미돼지의 젖꼭지를 따라 쪼르르 누워있는 열 두 마리의 새끼들이 금방이라도 눈을 빼꼼이 뜨고 쳐다 볼 것만 같은데 아무리 고급요리라 해도 그것을 입에 넣고 씹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참, 이 흑백사진의 옷은 북청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였지…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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