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너희가 김치를 아느냐?

2004-10-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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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김치를 담갔다. 아침에 어머님 옆에서 파, 마늘, 피망, 미나리 등을 다듬는 일을 약간 도와드리고 일을 갔다 오니 빛깔 고운 김치가 담긴 병들이 부엌 싱크대 위에서 반갑게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금방 뜸이 든 흰쌀밥에 어머님이 부러 남긴 양념으로 맛깔스럽게 버무린 겉절이를 얹어 삽시간에 한 그릇을 쓱싹하고 못내 아쉬워 반 공기 더 깨끗이 비워내니 북청 물장수 밥상이 이런 것이리라.
이곳 LA에 살면서는 김장이라는 것을 할 일도 기회도 없지만, 결혼 전 부산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 때에는 해마다 어머니의 측근 아줌마 부대들이 오셔서 ‘김장품앗이’ 하는 것을 보았었다. 그럴 때마다 내게는 ‘김치 맛보기’라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지곤 했다. 거치적댄다고 저리 가거라 하셔도 요리조리 옮겨 다니며 아양을 떨다 보면 어김없이 맛보기의 첫 순서는 내 차지가 되는 거였다. 결혼 후에는 또, 시어머님이 양념이 잘 배인 배추 줄기를 내미시며, “얘야, 맛 좀 보거라”, 혹은 “간 좀 보거라” 하시기 때문에 거의 매번 우리 집 김치의 첫 맛을 보고 평할 수 있으니 이게 웬 행운인지.
김장이 다 완성되면 한 포기씩 얇은 비닐에 싸서 아버지가 마당 한 쪽에 깊이 파고 미리 묻어 둔 옹기에다 차곡차곡 담아 겨울이 지날 즈음에 살얼음이 살짝 덮인 김치를 꺼내어 먹곤 했다. 늦가을이면 아버지가 수북히 쌓인 낙엽을 모아 태우실 때, 눈물 나게 하던 매캐한 연기와 함께 양푼 하나 끼고 입김 호호 불어 가며 김칫독으로 뛰어가던 일이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매콤한 양념을 진하게 버무리는 경상도나 전라도식 김치보다 우리 가족은 우리 입맛에 맞게 삼삼하고 시원하게 만들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콜레스테롤이랑 혈압, 당의 수치가 꽤 높은 어머님에게 김치만큼 유익한 음식이 없다는 걸 알게 된 뒤로는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고 좋은 맛을 낼 수 있게 도와주는 재료들을 골고루 섞어 만들고 있다.
우리 집을 드나드는 외국인 친구들은 ‘홈메이드 김치’ 한 포기씩 얻어 가는 걸 대단한 혜택으로 여긴다. 특히 성인병이 있는 이들은 맵고 짠 것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사먹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 그래서 어머님은 본의 아니게 김장도 아닌데 많은 양의 김치를 담그실 때가 종종 있다.
한국식 김치의 맛과 효능은 이미 학계에서 연구, 발표되었고 세계가 인정하는 것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터이지만, 며칠 전 모 일간지에 조그맣게 난 ‘김치 밀리고’란 제목의 기사를 읽고서는, ‘너희가 김치를 아느냐?’라고 감히 외치고 싶었다. 내용인즉슨, 지난해까지 일본의 김치 수입시장에서 절반 이상의 점유율을 보여왔던 한국산 김치가 중국산 김치에 밀려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중국산 김치는 30% 이상 수입이 늘어난 데 반해 한국산 김치는 제자리걸음에 머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언뜻 보기에 아직까지는 절반 정도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싼 가격과 중국식 김치 담그기 유행을 이끌어내고 있는 중국의 힘을 언제까지 막아낼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을 떨쳐내기 어렵다.
버젓한 남의 나라 역사까지도 바꾸려는 민족이 아닌가. 종군 위안부와 교과서 문제로 속을 팍팍 긁어대고,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는 일본의 오만함도 요즘 한창인 한류열풍과 더불어 한국식 김치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것 같아 은근히 기분 좋았는데 이게 웬 일인가 말이다.
적잖은 성공을 이룬 김치 사업가들께서 더욱 맛좋은, 늘 한결같이 정직(?)하고 건강(?)한 김치를 만드는데 힘을 써서 김치 종주국이란 왕좌에서 결단코 물러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우리김치의 가치를 알리는 것 또한 사업가들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인 우리에게도 감당할 몫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성영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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