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퍼우먼 우울증

2004-10-1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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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가을로 변하면서 추석,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연말연시, 설날 등 많은 명절과 선물계절을 보내면서, 주부의 수고가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인지 주부 우울증에 대해 자주 접하게 된다. 하지만 ‘수퍼우먼 우울증’은 어떠한지 30대 중반의 박씨의 사례를 통하여 알아보자.
박씨는 대학원 교육을 받은 고학력자이다. 대학 시절 만난 남편과 결혼한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둘 다 고학력자이었기에 졸업 후 좋은 직장을 쉽게 잡았다. 다른 부모들처럼 좋은 학군과 이웃환경에서 자녀 교육을 시키고자 교외로 이사 나간지 근 2년이 되어간다.
남편이 장손이고 박씨 또한 장녀이기에 한국에 있는 시집과 친정 양쪽의 가족과 친척이 자주 방문하여 머물고 가곤 했다.
자식으로서의 도의를 다하고, 좀 더 완벽한 며느리가 되고, 친척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어떤 가족이나 친척의 갑작스런 방문도 마다 않고 잘 대접하였다.
직장에서는 박씨가 ‘수퍼우먼’으로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다. 모범학생이었던 박씨는 모범 직장인, 모범 아내, 모범 엄마, 모범 며느리로서 손색이 없어왔다. 남편의 사랑과 감사, 아들 둘 기르는 재미, 직장생활의 만족감, 주위의 칭찬과 인정이 있었기에 힘들고 어려움을 느낄 새 없이 참으로 열심히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남편 회사에서 갑자기 감원조치를 내리면서 그 타격을 받았다. 1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여기저기에서 임시직으로 일한 지는 6개월이 되어간다.
남편에게 대우와 보수가 적절한 직장을 찾는 것이 생각보다는 쉽지 않았다. 가족 수입이 줄었고, 박씨는 집 융자금을 비롯하여 각종 지출 등에 대해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자꾸 걱정과 짜증만이 늘어갔다.
남편은 자신이 곧 든든한 직장을 잡을 테니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박씨가 답답한 마음을 토로할라치면 남편은 그저 묵살해 버리곤 했다. 남편의 낙천적인 태도가 예전에는 좋았지만, 이제는 오히려 화나고 짜증나게 한다.
하지만 박씨는 여태까지 모범생으로만 살아왔기에 자신의 짜증스럽고 화나는 감정을 누구에게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들을 실망시키는 것도 싫지만 자신의 창피함을 견디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박씨가 자신의 화를 안으로 삭히기 시작하면서, 화를 표현하기보다는 입을 더욱 더 다물어버리고 사람들을 외면하고 혼자 있기만을 원했다. 결근이 잦아지게 되었다.
도대체 자신의 실제 삶은 없이 주위사람들 만을 위한 모범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닌지 하고 의아해 하곤 하였다. 돌아오는 명절들을 치르면서 자신의 화가 변하여 생긴 우울증이 더 심해지지는 않을까 벌써 두려움이 앞선다.

이 은 희 <결혼가족상담전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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