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는 친일파’

2004-10-0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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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지뀨-세쯔’라고 하여 당시 일본천황 부인의 생일이었다. 내가 살던 읍에는 공립소학교가 둘 있었는데 우리 조선인이 다니는 학교와 또 하나는 일본인 학교였다. 해마다 지뀨-세쯔가 오면 두 학교의 여자애들만 합동으로 신사참배를 가게 되어 있었다.
교장실에서 나를 부른다고 하여 가슴을 두근거리며 조심조심 들어갔다. 교장 말씀이 “금년 지뀨-세쯔에는 영광스럽게도 우리 학교에 기회를 주었으니 대표로 나가 잘해달라”고 하면서 종이 한 장을 내게 건네주고, 받고, 하는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교장선생이 하라는 대로 그 단순한 동작을 몇번이고 반복해야만 했다.
신사에서 국경일이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식순에 의해 ‘다마구시 호-뗑’이란 절차가 있는데 저명인사가 걸어나와 아카시아 나뭇잎 같이 생긴 잎사귀 한 개를 정중하게 제단에 바친다. 한데 그 일을 조선학교 생도인 나에게 시킨다 하니 감히 짐작이나 했으랴!
그런데 만약 그날의 나의 모습이 사진에 찍혀 어느 창고에서 나왔다 하자. 떠들기 좋아하는 요새 젊은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 “어린것이 이런 짓까지 하며 친일을 했구나 끔찍하다!” 그런 말이 귓전에 들리는 것 같다.
사실 그때 내가 원해서 나간 것은 아니라고, 완전히 타의에 의해 6학년 여자반 반장이었기에 교장실에 불리어 갔던 것뿐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 지금의 잣대로는 접근조차 어려운 처지에서 오해만 받고 번민하다 간 말없는 애국자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요즘 한국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친일문제는 가볍게 따질 일이 아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학자들에게 맡겨야 한다.
나는 일제시대를 사는 동안 이 일을 빼고도 친일파로 몰릴만한 일을 몇가지 더 남긴 기억이 있다. 여고 4학년때(1943년) 교장실에 불려가니 처음 보는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방 신문사의 편집자라고 말하면서 “이번에 조선과 대만에 시행되는 ‘해군지원병 모집’에 관한 감상과 지원자들을 격려하는 글을 써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교장선생은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오늘은 수업에 안 들어가도 좋으니 특별실에 가서 글을 써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나는 열심히 썼고 그 내용을 일일이 기억은 못하지만 아마 요즘 사람들이 그 글을 본다면 이를 갈며 덤벼들 것이다.
2차대전이 일본에게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해 겨울에는 ‘학도지원병’ 제도를 발표하였다. 그 때도 같은 신문사에서 ‘오빠가 학병에 나가게된 학생들의 글을 보내달라’고 부탁이 왔던 모양이었다.
나는 오빠도 없으면서 학병에 가는 오빠에게 밤을 새워 간절한 편지를 써야만 했다. 그리고 60년도 더 흘렀다.
얼마전 라디오에서 친일파들이 쓴 글이라며 읽어주는데 나는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그 때 내가 쓴 치졸한 문장과 꼭 같은 글들을 들으며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천황폐하의 일시동인의 귀한 배려로,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한몸이라는 뜻)의 따뜻한 은혜를 입고 사는 우리들은…”
교육자, 학자, 문필가 등 조선의 쟁쟁한 지성들의 글이 여고생의 작문 수준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 이 분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런 어휘들을 나열했을까? 아니다.
식민지의 가엾은 중생들의 멀지 않은 장래를 내다보며 그 시대가 그어놓은 테두리 안에서 극도로 유치하게 아부하는 시늉을 했으며 일본이 원하는 글로 철저히 위장했다고 나는 본다.
우리는 그 점을 곱씹어보며 신중하게 시간을 두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 분들이 당신들보다 생각이 모자라서 그런 글을 썼겠는가? 다수의 뜻으로 모처럼 국권을 맡은 당신들이 이 시점에서 꼭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머리를 싸매고 대한민국을 잘 만들 궁리만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국민과 더불어 똘똘 뭉쳐 세계로 뻗는 일이 더욱 시급한 일인줄 안다. 과거에 얽매어 허우적거릴 여가는 없다. 과거지사를 묻는 일은 전문가들의 몫이라고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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