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사는 이야기 ‘몬스터’(Monster)

2004-10-0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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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미와 우아함의 조화가 절묘하게 느껴지던 여배우 샬리즈 테론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처음 ‘몬스터’라는 영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바비 인형 같은 금발의 여배우가 흉할 정도의 이상한 모습으로 분장하고 나와서 열연을 한다는 것에 흥미를 느껴 DVD를 빌려다 보았다.
주인공 아일린으로 분장한 샬리즈 테론은 치아도 고르지 못하고, 살도 많이 쪘고, 머리도 부스스해서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영화는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13세 때부터 거리에서 몸을 팔던 아일린이 레즈비언 셀비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사랑을 경험하고, 돈을 벌기 위해 다시 거리에서 몸을 팔다가 그녀를 묶어놓고 가학적인 섹스를 하려는 남자를 총으로 쏘아 죽인 것을 시작으로 연쇄 살인범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전혀 과장됨 없이 사건들을 차분하게 나열해 나가는 진행도 당황스러웠지만, 가장 충격스러운 것은 영화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식욕을 잃고 수저를 놓아야 했다. 그리고는 계속되는 복통으로 배를 움켜쥐고 영화를 보았다.
내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럽게 느껴졌던 것은 살인이 아니라 매매춘이었다. 한번도 내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고,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간접 경험조차 해본 적 없이, 그저 TV나 영화, 소설 등을 통해서만 어렴풋이 알고 있던 매매춘을 담담하게 그려놓은 영화를 보면서, 특히나 그녀가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파는 그녀의 고통이 강하게 전달되어졌다.
여성학을 공부한 후배가, ‘윤리를 땅에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여성만을 손가락질하는 단어인 ‘윤락’은 잘못된 것이고, 성을 사고 파는 행위 전체를 일컫는 ‘매매춘’이 옳은 표현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이 나서, 될 수 있으면 그리 표현을 하려고 하지만, 솔직히 내게 있어서 성을 사는 사람의 정신상태나 마음가짐은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고, 성을 파는 입장의 여성 편에서 이해를 하고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나의 영혼만큼 소중한 것이 나의 몸인데, 돈을 위해서 그걸 팔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러한 직업을 가진 자기 자신을 ‘전문가’라고 생각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있어서도 협상의 여지가 없는 중요한 것들이 있다. 가족, 명예, 긍지, 그런 것들 외에도 내게는 음악이 내 삶에 있어서 더 없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야말로 먹고살기 위해서 나도 돈을 받고 내 음악을 팔아야할 때가 많았다. 연주를 하거나 누굴 가르치는 것은 여기 포함되지 않는다. 연주를 하는 것도 남을 가르치는 것도, 내가 전문가로서 받아온 교육과 훈련의 일부이다.
그러나, 단지 피아노를 칠 줄 아는 한 사람의 기술자로 전락해서 돈을 벌었을 때는 내게 더 없이 소중한 음악을 팔았다는 생각에 얼마나 마음이 상하는지 모른다. 그 경계선이 설명하기에 좀 모호한데, 내 자신이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전문가’라고 스스로 긍지를 갖느냐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전문가로서의 긍지를 갖지 못하고는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도저히 하지 못할 일들이 많다는 것을 요즘 들어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일을 행함에 있어서도 관계자가 바뀌면서, 내게서 전문가의 옷을 벗겨버린 채 수치스러운 매매자로 몰아세우는 상황도 겪었다. 가장 마음이 상할 때는 음악적으로 옳은 것이 무엇이라는 걸 알면서도, 음악적이지 않은 쪽을 택하도록 강요받을 때였다. 그럴 때는 나의 음악적 영혼을 돈 몇푼에 팔아버린 것 같아서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비틀거렸다.
꼭 음악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구든 맡은 바 소임을 기쁘게 행하다가도 전문가로서의 긍지를 박탈당하고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소중한 무엇인가를 파는 사람 취급을 당했을 때는 견디기 힘들어질 테니 말이다. 그런 경우에는 두 가지 선택이 주어진다. 맞서 싸워서 당당하게 내 권리와 긍지를 되찾던가, 아니면 그만두고 나오는 것이다. 그만 두고 나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아일린은 불행히도 상대를 죽이는 것으로 탈출구를 찾은 듯 하다.
평소에 한번도 나와 상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몬스터’를 보면서 인간은 누구나 매매춘과 같은 덫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싫지만 해야만 되는 일들을 하는 것은 살면서 누구나 하는 경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 같은 상황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긍지를 잃지 않는다면 그 일을 그다지 힘들지 않게 계속하는 것이 가능하다는데서 삶의 버거움과 가벼움을 동시에 느낀다.

새라 최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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