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여성

2004-10-0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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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영화 매니아들
추억사랑 못말려요”

“혹시 ‘자유부인’있어요? 사실 내일이 결혼기념일인데, 우리 마누라가 옛날 데이트할 때 극장에서 봤던 영화를 꼭 보고싶다고 하네요. 거참, 하도 오래된 영화라...”
“그 영화 지금 대여중인데, 전화해서 오늘 중에 반환해줄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아, 있군요. 그럼, 됐어요. 수십년 참았는데 몇 일이라고 못 참겠어요. 그럼 최무룡이가 나오는 영화, 그 뭐더라 맞아 ‘빨간마후라’는 있습니까?”
6가와 카탈리나에 위치한 비디오 전문점 ‘아름다운 영화세상’에서 오고가는 대화다. 비디오 대여점 주인에게서 영화 매니아라는 인상을 받는 건 당연하지만, ‘아름다운 영화세상’을 운영하는 이희정(42)씨는 매니아 수준을 넘어선 주인이다. 단골손님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 마디로 ‘젊은 사람이 취향 한번 독특하다’.
10월이면 오픈 1주년을 맞는 아름다운 영화세상은 희귀영화, 컬트무비, 추억의 명화 전문점.
한국에서도 제법 큰 비디오가게에 가야 있을법한 한글 번역판 영화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셰인’‘애수’ ‘무기여 잘 있거라’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등 추억의 명화부터 최은희, 김진규, 신성일, 윤정희 같은 왕년의 스타들이 나오는 구닥다리 한국영화까지 없는 게 없다. 물론 최신영화는 기본으로 갖춰져 있고, 한국 드라마는 DVD세트로 출시된 것들만 대여한다.
“매주 정기적으로 우리 가게에 출근하다시피 하는 단골손님들이 있어요. 요즘 가장 많이 빌려 가는 영화가 신상옥 감독의 ‘만종’이에요.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노년층에겐 여전히 인기 있는 배우가 김진규, 신성일 이잖아요”
그렇다고 이들이 한국영화만 찾는 건 아니라는 이씨는 옛날부터 빼닥구두(하이힐) 신고 다니며 멋쟁이 소리를 들어왔던 신식 할머니들은 클래식 고전 영화들을 빌려가고 심지어는 주문 구입해간다고 한다. 그때 그 시절이 그리운 이들이 잉그리드 버그먼이 나오는 흑백영화 ‘가스등’, 추억의 고전멜로물 ‘모정’, 총잡이 서부영화 ‘셰인’ 등 그야말로 주말 명화극장에서나 보던 영화들을 보면서 낡은 사진첩을 들여다보듯 그 속에 담겨있는 자신의 추억을 곱씹는 것.
임예진이 나오는 하이틴 영화 ‘진짜진짜 미안해’에 가슴 뛰던 세대, 영화 ‘애수’에 나왔던 비비안 리와 로버트 테일러의 애절한 사랑을 꿈꾸던 세대라는 이씨는 학창시절 공예를 전공한 미술학도였다. 일찌감치 결혼을 하면서 미술을 중단했고, 워낙 가만히 있질 못하는 성격이라 장사할 게 없을까 궁리하다가 86년 2월 비디오 대여점을 하나 차렸다. ‘초류향 전기(20편)’과 ‘외로운 검객(17편)’ 등 요즘 생각하면 엉성하기 짝이 없는 중국무협시리즈들을 포함한 223편의 비디오로 문을 연 가게였다. 그러나, 무협영화매니아들이 단골이 되면서 이씨의 영화사랑이 시작됐다. 당시 이씨의 가게에는 살림집이 딸려 있었는데, 무협영화의 후속편이 나오는 날이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하루를 참지 못하는 손님들이 가게문을 두드려대는 통에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20년 간 비디오 대여점을 꾸리면서 영화세상을 알게 되고, 매니아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어요. 내 입장에선 단지 구색을 맞추느라 한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꽂아두었던 비디오를 한 손님이 발견하고 먼지를 툴툴 털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 것을 봤을 때, 누군가에게 기쁨을 준다는 게 참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씨는 ‘으뜸과 버금’의 회원이다. 90년대 이전 이민 세대에겐 생소하겠지만 비디오샵 ‘으뜸과 버금’은 서울YMCA의 좋은 비디오샵 경영자 모임에서 출범된 비디오 대여전문점 체인으로, 건전한 비디오 문화 정착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는 단체다.
일년에 한두 번씩 좋은 비디오, 주문 받은 비디오를 구하러 한국 출장을 간다는 이씨는 지난 봄 김희갑 주연의 ‘정 따라 웃음 따라’ 테입을 15만원이나 주고 구입해 왔고, 70년대 만인의 연인이었던 경아가 나오는 영화 ‘별들의 고향’과 장미희 주연의 ‘겨울여자’는 아예 미주판권을 구입해 10월중 DVD로 출시할 계획이다. (213)427-0506

비디오가게 주인
이희정씨

<하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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