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4-09-29 (수)
크게 작게
죽음의 준비

우리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서는 해마다 추석때 로즈힐 공원묘지에서 합동추모예배를 갖는다. 따라서 우리는 매년 추석 전 토요일이면 추모예배에 참석하고 성묘도 하고 돌아온다. 그래서일까, 결실의 계절 가을은 내게 ‘죽음’을 반추하는 계절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젊은 시절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한꺼번에 많이 겪었다. 83~84년 무렵이니 벌써 20여년전.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를 앓던 조카아이가 8년의 고된 삶을 마쳤다는 소식이 제 1보였다. 그로부터 2주도 안 돼 1남6녀중 귀한 외아들이었던 오빠, 하나밖에 없던 오빠가 서른셋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 충격과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바로 다음해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석달후엔 이곳에서 둘째 형부가 서른일곱의 젊음과 소중한 가족을 뒤로하고 소천하셨다.
발병, 입원, 수술, 투병, 사망, 장례로 이어지는 몇 달간의 소용돌이들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많은 혼란과 사건의 연속이었으며 가족 모두의 삶을 흩뜨려 놓았고 우리에게 두가지 교훈을 남겼다. ‘아무일 없음’의 소중함과 ‘죽음의 일상성’이다. 죽음은 바로 옆에 있었고 내가 아는 사람들, 더불어 살던 사람도 죽는 것이었다.
죽음을 가까이서 목도하는 것은 사람의 살아가는 길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것은 나이가 젊어서 경험할수록 좋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죽음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인생의 유한함을 눈으로 보았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불필요한 집착을 어느 정도 거두게 되기 때문이다.
너무 썰렁한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나는 또한 매일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내가 존경하는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중 이런 내용을 기억한다.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고, 죽음을 의식하며 바로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은 더 이상의 시간이 없다는 것, 누군가 나의 자리에 들어와 앉는 것. 누군가 내가 하던 일을 이어서 해나가는 것, 그리고 누군가 나의 책상 서랍을 열어보고, 나의 소지품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정돈되지 않은 삶을 들켜서 부끄러울 것 같다면 평소에 정돈된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유언장과 수의를 미리 준비하면 건강하고 장수한다는 옛말이 있다. 생로병사라는 자연의 법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몸과 마음가짐을 삼가기 때문일 것이다.
장수하려는 욕심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오래전 나의 장례일정을 대충 만들어놓았다. 언젠가 친지의 죽음과 장례를 겪으면서 덕스럽지 못한 광경들을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내가 죽은 후에 내가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나의 장례식이 치러진다면 몹시 불쾌할 것 같아서다.
그 내용중 한가지만 공개하자면, 나는 입관식과 장례식을 두 번에 걸쳐 하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는 거의 관습처럼 입관예배와 영결예배를 연이어 갖고 있는데 그 두 예배는 내가 보기에 내용상 아무 차이가 없다.
굳이 두 번 하는 이유는 낮에 열리는 영결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조객들이 전날 저녁시간에 찾아올 수 있도록 입관예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편의를 제공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혹시 한푼이라도 조의금을 더 걷기 위한 것이 아닐까?
어떤 유가족들은 일요일날 교회에서 광고하여 더 많은 사람이 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장례일정을 늘이기도 한단다. 나는 내 시신을 앞에 놓고 나의 가족들이 조의금을 더 걷으려고 머리를 굴리거나 동분서주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가는 길을 정말 보고 싶은 사람이면 한번 있는 장례식, 어렵게라도 시간을 내어 참석할 것이고, 시간을 내지 못해 오지 못할 사람이라면 꼭 올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참 웃기는 사람이지? 내가 죽고 난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진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내 인생의 마지막 장 그 다음까지 내 맘대로 하고 싶은 욕심, 그것마저 버려야 진짜 마음을 비운 죽음의 준비가 되는 것일까.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