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4-09-2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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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꽃차 ·비

지난주 한인타운은 나흘동안 벌어진 한국의 날 축제로 시끌벅적했다. 사람들이 너무 몰리는 바람에 연일 교통체증이 장난이 아니었고 장터는 발디딜 틈도 없어서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성황을 이루었다.
한국의 날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코리언 퍼레이드’는 한국일보가 지난 31년간 단독 주관해온 행사다. 따라서 매년 퍼레이드가 열리는 9월의 셋째 토요일이면 한국일보 직원들은 모두 올림픽가에 나가 행사 진행도 돕고 함께 관전하는 것이 연례행사로 되어있다.
올해는 다같이 아주 야한 새파란색 티셔츠를 입고 하루종일 올림픽가와 장터를 누볐다. 처음에는 다들 티셔츠 색깔이 너무 유치하다며 비웃었으나 현장에 나가보니 가장 효과적인 단체의상 색깔임이 판명되었다. 다른 어떤 민간인도 입지 않는 극적인 색깔이었기에, 우리 직원들은 어디에 있든 눈에 확 띄었던 것이다.
매년 보는 광경이지만 꽃차가 지나갈 때면 나는 꽃차 탄 사람들을 한번씩 쳐다보곤 한다. 간혹 남자들도 있지만 대개는 젊은 여성들과 아이들이 한복이나 드레스를 떨쳐입고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지나간다. 꽃차 업체들이 자사의 이미지를 빛내줄 사람들을 태우기도 하고 우리 한국일보 꽃차에는 늘 남가주 미스코리아들을 탑승시키니 다 젊고 예쁜 미인들이다.
꽃차를 한번 더 쳐다보는 이유. 아주 오래전 나도 꽃차를 탄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1982년 퍼레이드때 내가 꽃차를 탔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내 가까운 주위에서도 거의 없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고, 왠지 창피하게 생각되어서 나의 이력에서 슬그머니 빼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미모로 뽑힌 것이 아니라 ‘쪽수’ 맞추기에 걸려든 것이 분명했다는 자격지심 탓이기도 하다.
미국 온지 한달도 안 되었을 것이다. 어느 일요일(그때는 퍼레이드가 일요일에 있었다), 당시 한국일보에 계시던 형부한테서 전화가 왔다. 빨리 두 조카아이와 한복을 입고 LA로 나오라는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나왔더니 우리를 데리고 올림픽가로 가셨고, 한 골목길에 주차돼있는 알록달록한 차에 올라타라고 하신 것이 이른바 ‘정숙희 꽃차사건’.
어느 업체의 꽃차였는지도 기억에 없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도 알기 전에 꽃차는 출발했고 나는 연도변에 늘어선 사람들에게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웨스턴까지 행진했다.
동서남북도 모르고 시차 적응도 간신히 되었을 어리벙벙한 무렵에 당한 일이었다. 그때 언니가 사진을 많이 찍어주었는데, 사진을 보면 나는 저녁 굶은 시어머니 얼굴을 하고 앉아 있다. 벌써 22년전이니 한창 나이 스물네살, 나도 고왔던 시절의 일인데 좀 예쁘게 하고 앉아서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꽃차를 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드는 것이다.
퍼레이드가 끝난 후 우리는 모두 장터로 갔다. 밤 9시부터 ‘비’와 박진영이 나오는 수퍼콘서트 역시 우리 회사 주관이어서 물샐틈없는 경호경비 작전을 펼쳐야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시큐리티가 없는 야외무대에 수퍼스타들이 등장하니, 오빠부대가 막무가내로 덮칠 것에 대비하여 우리는 수백명의 총대학생회, 스파트팀, LAPD 등과 입체적인 경호작전을 펴기로 하였다.
일단 무대 뒤쪽을 모두 통제하여 일반인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였고, 평소 잠겨있는 공원 뒤켠의 쪽문 바로 앞까지 비와 박진영을 리무진으로 공수, 순식간에 수십명이 에워싸면서 무대 뒤 천막대기실로 옮기기로 치밀하게 작전이 짜여졌다. 나도 ‘소수정예 경비조’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왔다갔다했는데, 사실 이 아줌마가 무슨 경비를 보고, 누굴 경호하겠나. 그저 마치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는 척, 쓸데없이 돌아다니느라 발바닥만 부르텄던 것이다.
과연 ‘비’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콘서트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써늘한 밤공기조차 뜨겁게 달구었으며 나는 그렇게 많은 한인들이 모인 것을 작년 할리웃 보울 콘서트 말고는 처음 보았다. 그러나 엄청난 인파가 모인 것치고는 질서정연하게 사고 하나 없이 콘서트가 끝났으니 말 잘 듣는 한인들의 저력, 다시 평가할 일이다.
덕분에 요즘 여고생, 아줌마 할 것 없이 다 넘어간다는 ‘비’도 가까이서 보고, 박진영의 멋진 춤과 노래를 라이브로 지켜보며 열광하는 시간도 가졌다. 다음달 있을 할리웃 보울 콘서트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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