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 패스트푸드 맞서 전통음식 보존하자 ”

2004-09-2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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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푸드 운동’
전세계 확산 일로

슬로우 푸드 운동(Slow Food Movement)은 1986년 이탈리아에서부터 시작됐다. 생각해 보라. 그 먹을거리 깔린 로마에 미국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맥도널드가 상륙한 거다. 피자리아와 리스또란떼가 한 집 건너 들어선 삐아짜 에스빠냐에 떡 하니 매장을 오픈 한 맥도널드. 이탈리아인들의 자존심은 뭉개질 대로 뭉개졌다. 아니, 뭐 먹을 게 있다고 맥도널드를 들여온단 말인가. 좌익 언론인 카를로 페트리니(Carlo Petrini)는 맥도널드로 대표되는 미국 팝 컬처의 폭력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와 일련의 뜻있는 사람들은 입맛을 표준화하고 전통음식을 없애는 패스트푸드의 폭력에 맞서 천천히 음미하는 식사의 즐거움, 전통음식의 보존을 기치로 내건 슬로우 푸드 운동을 전개했다.

1986년 이탈리아서 시작
45개국 550여지부 7만 회원
환경 ·식량 ·음식의 안전성 해결
시식회 ·웍샵등 다양한 활동


사실 유럽은 삶 자체가 슬로우 푸드 운동이다. 한번 식탁에 앉았다 하면 아페라티프부터 3-4코스를 대화와 함께 끌어가느라 2시간은 쉽게 지나가 버리니까. ‘중단 없는 전진’을 국시로 살아온 우리들에게 이 정도면 먹는 데 너무 쓸데없는 시간과 노력을 써버리는 게 아니냐는 의문도 생긴다. 하지만 어디 사는 게 그런가. 정성껏 식탁을 준비하고 요리를 음미하는 시간들만큼 살아있다는 기쁨을 만끽할 때가 또 있을까.
이후 이 운동은 전 세계로 확산된다. 이탈리아 브라(Bra)에 본부를 둔 슬로우 푸드 운동은 현재 전세계 45개국, 550여 지부에 7만 회원을 둔 세계적 무브먼트로 발전됐다.
슬로우 푸드 운동이 추구하는 이상은 슬로우 푸드 선언문에 잘 나타나 있다. 1989년 파리에서 채택된 선언문의 골자는 우리를 노예화하는 속도 전쟁에서 벗어날 대안을 슬로우 푸드에서 찾자는 것이다. 슬로우 푸드 운동의 지침은
①소멸위기에 처한 전통음식, 음식재료, 와인을 지킨다.
②환경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품질 좋은 음식재료를 제공하는 소생산자들을 보호한다.
③미래를 위해 어린이들과 소비자에게 미각교육을 행한다. 이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음식의 맛과 그에 대한 감각을 개발하고 음식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며 식탁의 즐거움을 깨닫게 해주는 교육은 어릴 때부터 시작돼야 할 교육이기에 어린이용 시식 지도책도 출판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벌써 이를 각 학교에서 사용 중이다. 이 책은 곧 영어로도 번역돼 서점에서 판매될 예정이다.
슬로우 푸드 운동본부가 그 철학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행사와 장기 프로젝트는 다양하다. 슬로우 푸드 시상대회, 우수 농산물·식품을 전시·시식하는 미각의 전당 행사, 희귀종을 보호하는 미각의 방주 프로그램, 어린아이들에 대한 미각교육, 유전자 조작 반대운동 등.
각 지부도 여러 활동을 벌이고 있다. 와이너리 방문과 시음, 특정나라의 음식으로 된 저녁식사, 푸드 생산자들과의 대화, 술과 음식 궁합 찾기 시음 시식회, 다양한 주제에 대한 간담회, 특별 저녁식사, 음악을 곁들인 식사, 슬로우 생활 심포지엄과 식사, 다른 지부의 방문, 가정음식 경연대회, 시음 웍샵 등이다.
식량문제와 환경문제, 음식의 안전성 문제를 해결하고 먹는 즐거움을 회복하려면 슬로우 푸드 운동의 여러 제시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자연의 흐름을 어기는 사철농업, 유전자 조작 농업도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친구 자녀들과의 외식은 우리의 아이들이 얼마나 패스트푸드의 신속성과 간편함에 젖어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좋은 기회다. “점심 뭐 먹을까?” 기껏 그들의 취향을 고려해 “짜장면?” 하고 제의를 하면 이에 대한 응답은 으레 “그거 시간 많이 걸리잖아요?”다. 아니 5분을 기다리지 못 한다니. 20-30분 걸리는 은대구 조림은 평생 먹어볼 일이 없겠다.
첫 번째 북미 지역의 슬로우 푸드 축제는 지난 2000년 9월 캘리포니아의 소노마에서 열렸다. 남가주에서도 슬로우 푸드에서 마련하는 행사는 자주 펼쳐진다. 지난 6월 샌타모니카 미라마 호텔에서 열렸던 ‘포크 앤 피노(Pork & Pinot)’ 시음 시식회도 그 이벤트 가운데 하나. 앞으로 있을 행사, 그 밖의 정보를 알고 싶으면 slowfoodusa.org를 방문하자.
전화 (212)965-5640. 할리웃 지부 (323)461-8686, 패사디나 지부 (626)799-5883. LA 지부의 웹 사이트는 slowfoodla.com
우리나라에서도 슬로우 푸드 운동은 조용히 퍼져가고 있다. 전 세계에서 우리만큼 성격 급한 이들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기에 더욱 필요한 것이 바로 슬로우 푸드 운동이다. 뜸을 들여 밥을 짓고 메주를 띄우고, 김치가 익기를 기다렸던 우리들의 먹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가 온통 슬로우 푸드다. 오래 삭힌 전라도 식 홍어회, 토하젓 등 사라져가는 한국의 슬로우 푸드를 살리는 일에 우리 모두가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할 터이다.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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