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사는 이야기 뉴저지 방문기

2004-09-1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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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지난 3월에 딸네 집을 방문했을 때처럼 J 권사님이 우리 집을 돌봐주시겠다고 호의를 베풀어주셔서 Labor Day 연휴 때 남편과 함께 3박 4일 동안 뉴저지를 다녀왔다.
남편은 뉴저지 연합 장로교회에서 주최하는 전교인 산상수양회의 강사로, 나는 다 목적으로. 주목적은 아들 내외를 만나는 것이었고, 그 외 딸네가 올라오면 만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못 만날 처지였는데 다행히 딸이 네 군사(?)를 거느리고 씩씩하게 올라와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사위는 감기 몸살로 못 오고. 또한 이곳 우리 교회에서 같이 지내다 뉴저지로 이사한 가정이 두어 가정 있는데 그분들도 만나게 되어 여간 흐뭇하지 않다.
뉴왁 공항에는 이 목사님 일행과 아들 내외가 마중을 나왔는데 아들은 병원에서의 격무 탓인지 약간 마른 듯했지만 햇빛을 오래 못 본 듯 허여멀쑥한 모습이 안 그래도 미남인데다 더 미남다워 보였고, 우리 사랑스런 며느리도 역시 병원에서 격무에 시달렸을 텐데도 원래 밝고 예쁜 모습에다 더 예뻐져 있어 보기에 아주 좋았다. 배가 좀 두둑해 보여 더 보기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들은 동부에 간 뒤로 까무잡잡한 얼굴이 확실히 훤해졌다. 남편은 곧 바로 이 목사님 일행과 함께 집회 장소인 포코노 수양회관으로 가고, 나는 아들 내외와 함께 뉴저지 동생네 집으로 왔다. 거기서 3박 4일을 머물기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들이나 우리 아이들이 뉴저지에 오면 으레 이 동생 집에 들러 머물곤 하는데 올케가 베풀기 좋아하고 마음이 넉넉해서 이 집은 항상 손님으로 들끓는다. 이번에 우리도(아들 내외, 딸 가족, 첫째 동생 가족) 이 올케의 여유로움 덕분에 마음 푹 놓고 북적거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뉴저지는 우리가 1977년에 이민 와서 처음 2년은 뉴욕 브루클린에서, 그 다음 2년을 보낸 고향과 같은 곳이다. 우리가 그곳에 있는 동안 이곳 남가주 지역은 찜통과 같은 더위가 맹위를 떨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고 하며 교인들이 우리더러 목사님 네는 동부로 피서 간거나 다름없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랬던 것 같다. 그곳은 뉴저지 특유의 선선한 초가을 분위기로 기후가 그저 그만이었으니까.
주일에는 25년 전에 우리가 뉴저지에 있을 때 다녔던 뉴저지 제일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됐는데, 이 교회에 우리 두 동생 가정이 장로로, 여전도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모두들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하면서도 만나는 분들마다 처녀처럼 그렇게도 젊고 곱더니 왜 이리 늙었냐고 야단들이다. 아들 내외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서 선물한 하와이산 진주 목걸이와 내 생일에 역시 아들 내외에게서 선물 받은 루비 반지까지 끼고 잔뜩 치장을 하고 갔는데도 말이다.
딱 한 사람만 “여전하시네요.”라고 인사하는데 나 듣기 좋아라고 그런 인사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런 인사가 그리 싫지 않고 기분을 좋게 해준다. 그래서 저쪽의 ‘왜 그리 늙었느냐’는 인사는 싸-악 무시하기로 하고 ‘여전하다’는 이쪽 말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렴 25년이면 강산이 두 번하고도 반은 변했을 텐데 내가 무슨 통뼈라고 안 변했겠는가. 하지만 ‘여전하다’는 인사가 역시 듣기에 좋다. 저쪽은 얼굴이 많이 변했다는 뜻일 거고 이쪽은 나의 분위기가 여전하다는 뜻이겠지. 이럴 때는 그냥 좋은 쪽으로 해석하는 게 현명하다.
롱 아이랜드에 사시는 사돈댁과도 식사를 같이하게 되었는데 내년에 며느리가 몸을 풀 때 꼭 와 보라는 당부를 받았다. 아-암, 물론 가 봐야지.
지난번 내 글이 그곳에도 실렸는지 나는 어느새 동서를 통틀어 소문난 방귀쟁이가 되어 있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 얘기로 인사를 대신했으니까. 시간이 없어 많은 분들을 만나보진 못했지만 형제들과 자녀들과 옛 교인들을 만나본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만족하련다.
아듀 - 뉴저지.

신은실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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