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비탈에 선 아이들 우리 할머니

2004-09-1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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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김치에, 딱 한번 맛있다고 말했을 뿐인데… 매일매일 10일도 넘게 먹은 오뎅 볶음이 상위에 버티고 앉아있었다. 할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사흘이 넘도록 싸돌아다니다가 이제 막 들어온 내 앞에 밥상만 들여놓고 바로 나가셨다. 야단이나,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걱정하신 낯빛도 아니셨다.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할머니는 언제나 내 옆에 계셨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가수생활을 하셨다. 엄마의 젖무덤이 한없이 그리웠던 그 시절에, 할머니는 가끔씩 무표정하게 내 앞으로 쪼그라 붙은 젖가슴을 들여 밀곤 했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비원의 담을 훌쩍 넘어 밤을 따다가 경찰서까지 끌려갔을 때, 중학교 1학년, 퇴학을 당했을 때,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몸뚱이만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으며 하루 온종일 방구들만 지고 있을 때, 남들은 귀신, 망나니 같다고 재발 그 새집 같은 머리 좀 자르라고 성화를 댈 때도, 할머니는 무표정하게 나를 대했다.
이후 미국에 왔고 결혼을 했으며, 자식을 낳았을 때도 그저 나를 한번 슬쩍 쳐다보시고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으셨다.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날 더 이상 숨길 수가 없는 상태까지 왔기에 “나는 마약중독자입니다”라고 고백을 했던 그 날, 난 처음으로 할머니의 슬픈 표정을 보았다. 눈물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네가 힘들었구나” 이 한 말씀만 하시고, 부엌으로 가셔서 내가 먹을 밥상을 차리고 계셨다.
이후에도 나의 방황은 계속되었다. 며칠씩 집을 나와 마약을 하며 온갖 못된 짓을 하고 집에 들어가도 언제나 따뜻한 밥 한 그릇을 할머니는 이불 옷장 사이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어 밥을 차리곤 했다. 아주 자주 내가 들어가지 않았을 때는 이불 속에 밥을 넣어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잠자리 이불을 내리곤 해서 밥이 쏟아져 이불 빨래를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할머니는 내가 목사가 되고 사역을 할 때도, 밥솥이 보온도 되고 전자렌지가 있음에도, ‘제발 밥을 퍼놓지 마시라고. 선교회에서 언제나 먹고 들어오는데 찬밥이 계속 남으니, 누가 먹겠냐고?’ 말리는 식구들의 구박에도 아랑곳 않고, 한번도 거르는 일없이 언제든 내가 들어오면 밥을 줘야 한다며 끝까지 고집을 부리셨었다. 일년 전 아프시기 전까지는 말이다.
할머니는 1년 동안 꼬박 자리에 누워 계시며 거의 모든 식구를 제대로 알아보질 못했고, 이상한 헛소리도 자주 하셨지만 나만은 언제나 알아보시고, 손을 잡으며 웃는 눈빛을 보내곤 하셨다. 때로 정신이 간간이 돌아오시면, 움직이지 않는 수족을 간신히 추슬러 부엌으로 들어가셔서는 내 밥을 챙기시곤 했다. 식구들은 더더욱 귀찮다고, 제발 좀 가만히 있으시라고, 싫어하며,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일일이 다 수발을 들어드려야 하는 상황에 당신이 스스로 밥을 차리시겠다니...
할머니에게 나는 영원한 꼬마아이였다. 그러나 몇 달 전부터는 전혀 움직이시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 저 세상으로 가실 날만 기다리는 그저 숨만 쉬는 송장 같은 모습이 되어, 내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했다. 그렇게 누워 계시는 것보다는 빨리 편히 가시는 것이 낳을 것 같다는 생각이 수없이 들기도 했는데.
막상 두 주전 할머니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나니,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가슴을 치고 왔다. 모두들 90세가 넘었으니 ‘호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너무 슬펐다. 365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할머니가 챙기셨던 그 밥이 너무나 먹고싶어졌다. 이제 우리 할머니가 정성껏 담아놓은 뚜껑 덮은 밥은 앞으로 받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할머니의 밥에 담긴 끊임없는 사랑이 오늘 내가 살아가고 있는 건강한 삶의 양식이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할머니, 사랑합니다. 우리 저 천국에서 뵐 때까지 그곳에서 제 밥을 따뜻하게 데워놓고 기다려주셔요.’

한영호 목사
<나눔선교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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