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 주방일기’

2004-09-1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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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갖고 놀기

가끔 미국TV의 코미디 프로를 보면 파이를 집어던져 사람 얼굴이 크림 범벅이 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파이뿐 아니라 달걀, 소스, 케익, 스파게티 등 툭하면 각종 음식을 놀이도구로 사용하는 게임이 서양문화권에서는 많이 열린다. 얼마전에는 스페인에서 토마토 던지기 축제가 열렸는데 4만명이 몰려들어 1시간 동안 130톤의 토마토(2만달러 어치)를 사정없이 던지는 전투를 벌였다는 뉴스도 보았다.
음식을 귀하게 여기는 한국인의 정서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문화다. 어려서부터 ‘먹을 것 가지고 장난치면 벌받는다’든지, ‘일년동안 애쓰고 수확한 농부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밥 한 톨도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고 배워온 우리로서는 음식을 놀이 삼아 사람에게 마구 던져버리는 행위를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파이나 토마토 던지기보다 훨씬 더 심한 푸드 공연을 지난 주말 직접 목격했다.
아들이 다니는 보이스카웃 부대에서는 1년에 한번씩 대원 가족들 모두가 참가하는 패밀리 캠핑을 갖는다. 나는 캠핑 자체를 너무나 싫어하기 때문에 매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빠졌으나 올해는 그만 딱 걸렸다. 아들이 정색을 하며 “올해는 엄마가 꼭 가야된다”고 요구했기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토요일 낮 샌버나디노의 수양관에 도착했을 때 부대의 리더인 두 사람이 메인 행사장 바닥에 두껍고 널찍한 비닐을 까는 모습을 보았다. 왜 바닥에 비닐을 까는 것일까, 의아했지만 별 생각 없이 지나쳤다. 그 의문은 그날 밤 열린 실내 캠프파이어에서 풀렸다.
아이들의 스킷 공연, 아빠들의 ‘곰 세 마리’ 율동찬양, 엄마들의 합창 등 화기애애한 순서가 이어진 후 이윽고 피날레가 되자 아까 그 두 사람이 나오더니 비닐 위에 섰다. 그리고는 우리 모두에게 일정한 라임과 리듬이 반복되는 노래를 시키는 것이었다.
Good and Messy, We like good and messy/ Good and Messy, That’s what we do best 하는 노래였다. 다같이 부르고 나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당신 신발 속에 달걀 넣고 싶소?”라고 물었다. 상대방이 “오, 그거 정말 좋지요”라고 대답하자 두사람은 동시에 신발을 벗고 각자의 구두 속에 달걀 2개씩을 넣었다. 그리고는 함께 다시 신발을 신은 다음 그 자리에서 퍽퍽 뛰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또다시 우리에게 good and messy 노래를 시켰다. 그리고는 “양말 속에 이 소스를 넣고 싶소?”라고 물었고 상대방이 “오 그거 좋지요” 하자 신고 있는 양말을 잡아당겨 그 속에 찐한 바비큐 소스를 마구 뿌려 넣었다. 노래는 계속되고 다음은 주머니 차례, 바지의 앞주머니, 뒷주머니, 셔츠 주머니 속에 차례로 마요네즈를 쏟아넣었다. 그 다음은 바지, 아예 허리 벨트를 풀고 깡통 야채를 한통씩 쏟아넣었다. 그것도 그냥 집어만 넣는 것이 아니라 넣고 나서는 꽉꽉 누르거나 온 몸에 흔들어서 옷과 몸에 척척 들러붙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음엔 셔츠, 윗몸에도 끈적끈적한 소스를 부어넣었고, 그 다음은 얼굴로 올라갔다. 한사람은 초콜릿 시럽을 뒤집어썼고, 다른 사람은 소다 음료수를 뒤집어썼다. 절정은 마지막 모자, 크림치즈와 애플 소스 같은 것을 각자의 모자 속에 가득히 부은 두 사람이 머리에 눌러쓰는 것으로 쇼의 피날레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몸과 옷과 신발이 진하고 끈적끈적한 소스들과 음식 찌꺼기로 범벅이 되었고 바닥 역시 질퍽해졌다. 그래서 미리 비닐을 깔았던 것이다. 옷은 뭐가 되고 몸에 붙은 냄새는 어떠하며 머리에 뒤집어쓴 것들은 어떻게 씻어낼까?
아이들은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장단을 맞추며 재미있어 했으나 나는 하나도 즐겁지가 않았다. 나뿐 아니라 옆에 있던 미국 엄마도 별로 즐거운 표정이 아니어서 “도대체 미국사람들은 왜 이런 놀이를 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전적으로 남자들 놀이’라며 여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 공연을 벌였던 사람에게 물어보니 “아이들 앞에서 어른 남성의 ‘권위의식 깨기’와 같은 의식”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보이스카웃에서 아이들은 리더들을 두려워하고 복종해야 하지만 동시에 가깝고 친근한 존재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행위라는 것이다.
아들에게 어땠냐고 물어보았더니 재미있었단다. 또 ‘멋지지만 동시에 역겹기도 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 장면을 생각하면 온 몸이 음식 쓰레기통에 빠졌다가 딩굴고 나온 듯한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진정한 미국문화에 동화되지 못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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