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는 부모 말씀 잘 들었죠

2004-09-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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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자기 전까지 주로 내가 하는 일은 이런 문제, 저런 문제들을 “아, 그러세요? 정말 그러네요” 약간씩 감탄사를 섞어가며, 열심히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다.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젊은 부부가 찾아오셨다. 유달리 어려 보이고,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꽤 미인인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들어서는 이 부부는 여느 부부답지 않게 상당히 사이가 좋아 보였다. 대부분 선교회를 찾는 부부들은 척 보기에도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얼굴은 화가 가득 차 있는 대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서로는 얼굴조차 마주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나에게 자신들의 가슴 맺힌 사연들만 하소연 하다보니, 오히려 내가 중간에서 남편 입장을 아내에게, 아내 입장을 남편에게 통역까지 해줘야 하는 적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 부부는 참 이색적으로 비춰졌다.
이 부부는 남편이 나이가 많고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부모의 반대를 극복하고 어렵게 결혼을 했단다. 그러나 계속되는 친정 부모들의 지나친 간섭에 이를 피하여 미국으로 도망치듯 이민을 왔다고 한다. 아들 하나 달랑 낳아 정말 이제는 재미있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어려운 결정을 하였고, 열심히 페인트, 청소를 하면서 이제는 제법 먹고 살만한 기반도 닦았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겨우 14세밖에 되지 않는 아들녀석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보다 네살이나 많은 계집아이와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아들 녀석이 엄마를 닮아 제법 곱살하게 생기고 나이보다 훨씬 성숙해 유난히 여자아이들이 많이 따른다고 한다. 이 녀석이 눈만 뜨면 그 여자아이와 붙어 다니면서 학교까지 땡땡이를 치고 놀러 다니다가, 티켓을 받은 것도 모자라, 어느 날, 이들 부부가 몸이 갑자기 좋지 않아서 일찍 귀가하게 되었는데, 아들 녀석과 여자친구가 볼썽사나운 비디오를 켜놓고는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충격이 커서 엄마는 한참 동안 아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조차 없었고, 화가 난 아버지는 그만, 아들의 귓방망이를 몇 대 날렸다. 그러자 아직까지 어리게만 보았던 아들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버지에게 대들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가 아직까지도 어린아이인 줄 아느냐고? 이제 다 컸는데, 어떻게 자신의 여자친구 앞에서 자기를 이렇게 무시할 수 있냐고?”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부릅뜨고 정신없이 달려드는 통에 아버지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 자리에서 아들 녀석을 집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며칠이 지나 아들녀석이 다시는 여자친구를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다시 집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 이삼일이 지나자, 아들 녀석은 여자친구를 계속 만나는 눈치였고, 얼마 후부터는 부모의 지갑에까지 손을 대서 데이트를 다니는 것 같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지 이 아이들을 떼어놓을 수 있는가? 어떻게 그 나이에 부모까지 몰라보고, 자기보다 네살이나 연상인 여자친구에게만 정신이 팔릴 수 있는가? 도저히 이해도 안될뿐더러 용서가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저, 이런 말씀 드린다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부모님들도 당신들의 부모 말씀을 듣지 않고, 결혼하셨고 이민까지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부모님들의 심정이 어땠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셨는지요? 그리고, 그때 부모님들이 두 분의 심정을 모른다고 원망하시지는 않으셨는지요? 마치 부모님들께서는 아들에게 당신들은 전혀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고, 오직 부모님 말씀대로 행하셨던 것처럼, 말씀하시는 대요. 무조건 찬성하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아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이성관계란 뜯어말릴 수록 더욱 불이 붙는 것이 아닙니까? 이미 시작된 관계를 인정해 주시는 대신,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조건으로 달아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부모님께서 아들과 여자친구와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시간들을 만들어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만일 아들이 지금 부모님처럼 어디론가 없어져 버린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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