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4-09-0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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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파마

오랜만에 머리 파마를 하였다.

파마를 해본 지가 언제였는지, 까마득히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 되었기에 이것은 약간의 사건과 비슷한 파장을 몰고 다녔다. 거의 한 10년 동안이나 생머리를 하였고, 최근에는 항상 뒤로 돌돌 말아 올리고 다녔으므로 뜻하지 않은 파마 한번에 이미지의 대변신이 이루어진 것이다.
여자가 갑자기 헤어스타일을 바꾸면? 하는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정작 나는 그런 효과를 노린 것이 결코 아니다. 그냥 맨날 똑같은 나의 모습이 지루하기도 하고, 자꾸 파마하는 친구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요즘 자꾸 얼굴에 살이 쪄서 어떻게든 캄푸라치를 해보려는 돌파구가 엉뚱한 데로 튀었던 것이다.
‘디지털 파마’를 하면 자연스런 웨이브가 나오기 때문에 머리손질하기가 훨씬 편하다고, 친구들이 하도 꼬시는 바람에 큰마음 먹고 미장원에 갔다. 처녀 때는 파마도 많이 하고 커트도 자주 하며 미장원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나 내가 발걸음을 끊었던 사이, 어느새 한인타운의 미용실들은 규모가 커지고 숫자도 훨씬 많아졌으며 분위기가 매우 호화스러워져 나는 갑자기 촌사람이 된 것 같았다.
게다가 요즘에는 파마도 너무나 종류가 많고 가격도 비싼 탓에 일단 주눅부터 들었다. 디지털 파마, 세트 파마, 매직 파마, 롤 스트레이트 파마, 호일 파마 등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 수두룩한데다 가격이 보통 150~250달러는 한다니 팁까지 주고 나면 한 재산 탕진할 것 같았던 것이다.
디지털 파마는 롤에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감고 파마약을 바른 다음 그 롤 하나하나에 전기선을 연결해 가열함으로써 웨이브를 만드는 파마였다. 그렇게 머리를 자르고, 말고, 열 받고, 샴푸하고, 말리는 두어시간 동안 골똘히 여성잡지를 보다가 일어섰더니 아니, 거울 속에 웬 아줌마? 나는 너무나 놀라고 실망스러웠다. 눈에 익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되지 않게 젊은 시절의 창창했던 모습을 기대했기 때문일까, 도무지 어색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한 아줌마가 거울 속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어찌나 속상했는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파마약을 사다가 싹싹 빗어서 풀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본전 생각도 나고, 한창 시절의 그런 열정조차 없어진 것이 더욱 나를 슬프게 하였다. 에이, 맨날 자라는 머리, 더 늦기 전에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거지, 스스로 위로하면서도 새로운 나의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보기 좋다고들 하였다. 너무 오랜만에 헤어스타일을 바꿔서인지 인사를 많이 받았는데, 가장 많은 코멘트가 ‘인상이 부드러워졌다’는 것이었고, ‘파리의 연인 파마 같다’는 아부성 칭찬도 몇 건 있었으며, 몇몇 후배들은 ‘귀여워졌다’는 불경스런 의견도 서슴지 않고 내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 모든 말들이 내게는 ‘아줌마 같다’의 점잖은 동의어처럼 느껴지는게 문제다. 하긴 중년의 아줌마가 파마를 했으면 당연히 아줌마 같아야지, 아줌마 같지 않기를 바라는 내가 웃기는 사람인가.
아들은 내가 파마하러 간다고 했을 때부터 인상을 찡그렸다. 자고로 아들들은 엄마의 헤어스타일이 달라지는 것에 대해 유난히 거부반응을 보이는 법이다. 전에도 한번 짧게 잘랐더니 ‘엄마 같지 않다’며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했던 아들은 그러나 이번에는 아빠한테 단단히 주의를 받았는가보다.
파마를 하고 집에 들어갔더니 얼른 달려나온 아들, 내 머리는 잘 살펴보지도 않은 채 “엄마, 난 엄마의 헤어스타일이 좋아요” 하면서 허그부터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너 안 좋아하는거 엄마가 안다” 했더니 또 그 즉시로 아빠에게로 달려가면서 “아빠! 엄마는 내가 엄마 머리 안 좋아하는거 다 안대” 이러는거 아닌가.
아이가 어린 건지, 순진한 건지, 어리숙한 건지, 도무지 날 닮은거 같지는 않고, 이래서 딸이 좋다는 것일까. 아~ 피곤해, 아날로그 아줌마가 디지털 파마를 한 후유증이 의외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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