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AFI 영화제

2003-11-2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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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부터 16일까지 선셋에 있는 아크라이트 극장서 진행된 미영화학회(AFI) 주최 제17회 연례 LA 국제영화제는 예년에 비해 훨씬 더 만족스런 행사였다. ‘영화를 들어올리며’라는 표제(사진)를 내건 이번 영화제에는 전세계 42개국에서 134편의 영화가 출품됐는데 양질의 작품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관객의 호응도 뜨거웠는데 특히 영화제가 지난해부터 장소를 아크라이트 극장으로 옮겨 한 곳에서 영화를 상영하면서 과거에 비해 더 많은 관객이 찾아오고 있다. 10일간 계속된 영화제에서 ‘야만인들의 침입’(캐나다), ‘니코티나’(멕시코), ‘무용단’(미국), ‘침묵의 공모’(아일랜드), ‘휴즈’(보스니아), ‘전쟁의 안개’(미국) 등 13편이 매진됐다. 특히 빗나간 다이아몬드 강도사건을 둘러싼 니코틴과 살육의 블랙 코미디 ‘니코티나’(Nicotina)와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신학교를 무대로 한 동성애 문제를 통렬히 비판 고발한 ‘침묵의 공모’(Conspiracy of Silence)등 몇 편의 영화는 관객의 반응이 대단해 추가상영을 해야 했다.
나는 휴가를 내 영화제에 참가, 30편 정도를 봤다. 특히 이번에는 지난 9월에 토론토 영화제서 놓쳤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봤다. 첫날 본 제라르 드파르디외와 이자벨 아자니가 나오는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화사한 프랑스 코미디 ‘잘 가요’(Bon Voyage)와 ‘니코티나’부터 재미를 만끽, 이번 영화제 참석 결과가 상서로우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튿날 본 전후 보스니아의 한 마을을 클린턴이 방문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온 마을 사람들이 방문 준비하느라 법석을 떠는 신랄하고 우스운 보스니아 풍자극 ‘퓨즈’(Fuse)와 죽음의 침상에 누운 아버지를 둘러싼 가족 화해의 감동적인 캐나다 드라마 ‘야만인들의 침입’(The Barbarian Invasions)은 첫날 것들보다 더 재미있고 통렬했다. ‘야만인들의 침입’(영화평 ‘위크 엔드’판 참조)을 보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는데 사방에서 눈물들을 닦는 모습이 보였다. 이 영화는 역시 아버지의 죽음이 내용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독일영화 ‘고뇌’(Angst)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 4편의 영화는 내가 모두 토론토에서 놓친 것들인데 나는 이것들을 보면서 내가 왜 올해 토론토 영화제에서 예년처럼 큰 만족감을 못 가졌었던가 하는 까닭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 ‘제임스의 예루살렘 여행’(이스라엘), ‘노이 알비노이’(아이슬랜드), ‘오사마’(아프가니스탄), ‘벨빌의 세 자매’(프랑스) 등도 모두 토론토서 놓쳤던 것들. 정치성을 띤 두 작품 ‘눈이 못 보는 것’(What the Eye Doesn’t See)과 ‘로젠슈트라세’(Rosenstrasse)도 역시 토론토서 놓쳤던 영화였다. 페루 영화인 ‘눈이 못 보는-’은 149분짜리 장편으로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 정권의 부패와 비인도적 횡포의 교차사격에 휘말려든 시민들에 관한 강렬한 드라마다.
독일의 여류 마가레테 폰 트로타가 감독한 ‘로젠슈트라세’는 나치에 의해 감금된 유대인 남편들을 살리기 위해 베를린의 로젠슈트라세에서 농성을 벌인 독일인 아내들의 실화. 영화 시작 전 폰 트로타는 작품을 소개하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고 말했는데 공포와 죽음 가운데서도 희망과 삶을 찾는 훌륭한 작품이었다.
독일 사람들은 천성이 심각해 영화들도 대부분 그런 성질의 것이 많다. 영화제서 맨 마지막으로 본 ‘볼프스부르크’(Wolfsburg)도 심각하기 짝이 없으나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자기 차로 소년을 치어 죽이고 달아났던 남자가 이 소년의 엄마와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스릴러 분위기와 함께 속죄와 용서를 다룬 충격적인 영화다.
중국 영화로 인상에 남는 것은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미국으로 밀항하는 젊은 남자의 드라마 ‘표류자’(Drifters). 영화제서 관객상을 받은 같은 소재의 영화 ‘미국에서’(In America·영화평 ‘위크 엔드’판 참조)처럼 핑크빛으로 끝나지 않아 더 좋았다. 공장서 해고당한 남자의 이틀간에 걸친 오디세이인 일본 영화 ‘행복의 종’(The Blessing Bell)은 주인공이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한마디도 안 하는 독특한 수법을 사용했다. 매우 우습고도 삶을 돌아보도록 만드는 좋은 영화다.
이밖에도 모두 스페인 영화인 섹시하기 짝이 없는 ‘날 부드럽게 죽여줘요’(Kill Me Tender)와 바르셀로나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사랑을 정직하고 성숙되게 그린 ‘도시에서’(In The City)도 매우 즐겁게 봤다.
한국 영화는 김기덕의 ‘해안선’과 김현정의 ‘이중간첩’이 출품됐다. 서해안 초소 초병들의 얘기인 ‘해안선’은 무겁고 반복되는 내용을 가진 졸작. ‘이중간첩’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 안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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