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따사로운 햇살속 ‘민화 삼매경’

2002-01-04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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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람의 주말나기

▶ 성기순 (주부)

따뜻한 겨울 햇살을 가득 들여놓은 거실에서 화폭을 가득 메워 나가던 성기순(55·주부)씨는 잠시 붓을 내려놓고 이렇듯 부요한 주말 오후를 가능하게 해준 주변 모든 것들에 대해 새삼스레 감사를 드린다. 황금 같은 주말, 한번 붓을 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림 그리기에 몰입하는 엄마를 이해하고 알아서 끼니를 챙겨 먹는 자녀들이 고맙다. 어디 그것뿐인가. 쉬어가며 하라고 향기로운 차를 끓여다 살며시 밀어주는 남편의 배려에는 가슴 끝이 따뜻해져 온다.

그녀가 일명 ‘겨레 그림’이라고도 하는 민화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년 전, LA카운티 뮤지엄(LACMA)에서 열린 한국 민속 회화 전시회에 다녀오면서부터. 원시적인 색채가 강렬한 인상을 뿜어내는 민화는 그 순간부터 그녀의 시선과 혼을 온통 빼앗아버렸다. 대학 시절 전공이었던 섬유 예술로도 채워지지 않았던 예술에의 열정이 소박하고도 투박한 민화를 만나면서 불붙기 시작한 것이다.

쉬워 보였던 것이 혼자 시작하려니까 상당히 막막했었는데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린다더니 민화를 배우는 기회는 아주 우연히 그녀를 찾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급히 자리를 뜨면서 흘린 "오늘 민화 레슨이 있어서"라는 말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친구를 따라 나선 밸리의 클래스에서는 오미화 선생님을 중심으로 약 다섯 명의 학생들이 민화를 배우고 있었다. 사대부로부터 아녀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생활 속에서 즐겼던 민화에는 우리 겨레의 얼과 멋, 그리고 인생관, 종교관, 세계관, 우주관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민화를 그리기 시작한 지도 이제 3년 남짓한 세월이 흘렀다.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를 혼자만 배우기는 너무 아까워 주위 친구들에게 널리 소개한 것은 물론, 2000년 12월에는 민화를 전승·발전시키며 민족 문화의 세계화에 기여하기 위해 미주 민화 협회를 창립했다.

꽃과 새를 함께 그려 넣은 화조도, 담배 뻐끔뻐끔 피는 호랑이, 선비들에게 친숙한 책거리, 조국의 빼어난 다섯 개의 산을 그린 일월오악도, 그녀가 즐겨 그리는 민화의 소재들이다. 네 다섯 번 씩 덧칠을 하며 손으로 번지게 마무리를 하는 등, 애 낳는 것만큼 공들인 그림들이 벽에 걸리면서 조금은 휑해 보이던 집안이 환해질 때면 길고 외로웠던 창작의 시간들이 보상받는 것 같아 참 많이 행복해진다.

<박지윤 객원기자>jy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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