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남의 것을 비평하는 것이어서인지 나의 LA 영화비평가협회(LAFCA) 동료들 중에는 무뚝뚝한 얼굴들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1년에 한번씩 만면에 미소를 짓고 왁자지껄하면서 신이 난 아이들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날이 있다. LAFCA의 시상만찬 날.
이날은 LAFCA가 선정한 한해의 베스트들에게 상패를 주는 날로 포도주를 겸한 저녁(돈 없는 저널리스트들의 단체여서 음식 맛은 형편없다)을 들면서 파티가 진행된다. 2000년 베스트를 위한 파티는 17일 웨스트 할리웃의 벨아지 호텔서 열렸다. 하오 6시 칵테일이 시작되면서부터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대만영화 ‘와호장룡’이 작품등 4개 부문서 상을 휩쓴 만큼 유난히 아시안 손님들이 많았다. 나도 그래서 기분이 더 좋았다. 칵테일장에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와호장룡’의 촬영감독 피터 파우. 큰 키에 구레나룻과 턱수염을 길러 자기가 찍은 영화 속 마적을 연상케 하는(그러나 후한 인상이다) 그에게 “대나무 위 결투 신과 밤의 지붕 위 추격전을 어떻게 찍었느냐”고 물었다. 파우는 “대나무 높이는 60~100m여서 리모트 컨트롤을 사용해 찍었고 밤의 결투 신은 인공 달빛 하나에 의지해 찍었다”면서 “무척 어려웠다”고 대답했다. 그는 후에 수상소감에서 “여러분들이 영화에는 국경이나 국적이 없다는 것을 보여줘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와호장룡”으로 이날 작품상(공동제작 겸 감독)을 받으러 온 앙리(사진)를 1977년 그의 영화 `29아이스 스톰’을 놓고 인터뷰 할 때 만났었다. 그때처럼 잔잔한 미소를 짓는 그에게 악수를 청하고 “당신을 만난 적이 있다”고 인사하니 “서울서 봤느냐”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 내가 다음 작품에 관해 묻자 그는 “먼저 로맨틱 뮤지컬 ‘세임 올드 송’을 찍고 이어 ‘인크레더블 헐크’를 만들 예정”이라고 알려줬다. 상을 받아 무척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내가 이날 제일 보고팠던 배우는 ‘흡혈귀의 그림자’에서 진짜 흡혈귀 배우역을 해괴하게 해낸 최우수 조연남우 윌렘 다포(‘플래툰’)였다. 생각보다 훨씬 작고 말랐는데 내가 “당신 연기 좀 과장된 게 아니냐”고 물으니 “내 제스처는 대사를 대신한 것이며 나는 바로 작품속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에 결코 과장된 게 아니다”고 진지하게 반박했다. 다포는 수상소감에서 “여러분이 짙은 분장 뒤의 진실을 본 것에 대해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날의 최고 빅스타는 최우수 주연여우 줄리아 로버츠(‘에린 브로코비치’). 비평가들의 파티여서인지 이웃 마켓에 가는 소박한 옷차림이다. 깨끗하니 아름답고 영화에서 보다 작았는데 역시 입이 컸다.
나는 이 날로 로버츠에 대한 나의 평소 인상을 완전히 바꾸게 됐다. 배우애인 벤자민 브랫 없이 혼자 온 로버츠는 상을 받은 뒤 “나는 지금 12세짜리 같은 기분이며 겸손한 마음이다”면서 “평소 나에 관한 평을 안 읽는데 오늘 비평가들과 함께 있으니 너무 이상하다”고 흥분해 말을 더듬었다. 로버츠는 이어 “여기 선 내가 바로 꾸밈없는 나 자신으로 너무나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수퍼스타 티를 내지 않으며 그 큰 입으로 활짝 웃는 모습이 매우 순진하고 솔직해 보였다.
이 날의 해프닝(?)은 마약소지 혐의로 오는 29일 재판을 받게 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참석. 그는 촬영스케줄 때문에 못나온 최우수 조연여우 프랜시스 맥도만(둘은 ‘원더 보이즈’에 공연) 대신 나온 것. 그가 단상에 오르자 큰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는데 다우니는 “난 오늘 아무 상도 못 받았지만 사회자가 내 엉덩이를 만진 것에 감사한다”고 익살을 떨었다. 그리고는 맥도만이 써준 소감을 잘 못 읽겠다는 바람에 시상자인 에마누엘 레비가 대독하기도.
신인 수상자인 마크 러팔로(‘날 믿어도 돼’)는 영화 속처럼 텁텁한 인상에 매우 겸손해 친근감이 갔다. 먼저 악수를 청하는 그에게 “당신의 연기는 몬티 클리프트의 것을 연상케 한다”고 말했더니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며 좋아했다. 그는 수상소감에서 “여러분은 영화 제목처럼 날 믿어도 된다”며 실망시키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최우수 외국어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에드워드 양 감독은 키가 매우 컸다. 그는 “NBA의 MVP상을 받은 샤킬이 된 기분”이라며 “여러분의 관대함에 감사한다”고 인사말을 했다. 안경 낀 물리선생 같은 최우수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에린 브로코비치’와 ‘거래’)는 “나는 행운아이며 내 직업을 매우 사랑한다”면서 “어떤 난관이라도 헤쳐나가며 작품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영화 촬영 때문에 불참한 최우수 주연남우 마이클 더글러스(‘원더 보이즈’)를 대신 해선 그의 새색시인 배우 캐서린 지타-존스가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