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마지막 주다. 모란이 지고 아카시아 향이 바람에 실리며, ‘5월의 여왕’ 장미가 만개한다. 장미는 왜 하필 이 시기에 피는가. 결코 찰나의 화려함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땅의 온도, 벌과 나비의 활동 주기, 여름 햇살의 길이를 정확히 읽고, 씨앗을 맺기에 가장 좋은 시점을 스스로 결정한 결과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자신이 뿌리내린 땅과 계절을 이토록 정밀하게 계산하며 산다. 철을 안다는 것, 즉 ‘철이 든다’는 말의 본래 의미는 이처럼 자연의 때를 알고 미래를 준비하는 영리함에 있다.
선가(禪家)에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는 서슬 푸른 화두가 있다. 앞서 득도한 이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해서는 결코 자신만의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이다. 선구자가 어떻게 길을 열었는지 그 본질은 이해하되,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선 이 시대, 이 땅의 조건 위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나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미주 한인 공동체가 이민 선배들의 생존 방식을 그대로 답습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지금 정체성을 더 확고히 해야 하는 전환기에 서 있다. 미주 한인은 한국에 사는 한국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미국인도 아니다. 북향 담벼락의 장미와 남향 언덕의 장미는 종(種)은 같을지언정 전혀 다른 환경 속에 존재한다. 미주 한인은 한·미 두 문화의 문법을 동시에 구사하는, 세계가 아직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집단이다. K-컬처가 전 세계를 뒤흔드는 이 시대에 우리는 그저 거대한 파고의 수혜자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창조적 발신자가 될 것인가하는 판단을 해야 한다. 한국의 폭발적인 창의성과 미국의 합리적인 시스템을 결합하는 것, 미국과 한국을 잇는 단단한 다리로서 독자적인 경제적·문화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만의 ‘득도의 형식’ 즉 새로운 미주 한인의 길을 찾아내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정체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짓는 것이다. 미주 한인들은 미국 시민으로서 이 사회의 권리와 의무를 짊어지면서도, 한민족의 역사적 기억과 문화적 유산을 함께 품고 있다. 이것은 약점이 아니라 두 세계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강력한 전략적 자산이며,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에 뿌리를 둔 미국 사회를 더욱 풍요롭게 살찌울 핵심 자원이다.
미주 한인 이민사 123년의 여정은 계절의 흐름을 닮았다. 1세대는 황무지 같은 미국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그것은 3월의 매화처럼 혹독한 겨울 추위를 뚫고 피워낸 처절한 ‘생존의 꽃’이었다. 그 토대 위에서 성장한 1.5세와 2세는 4월의 벚꽃처럼 화려하게 미국 주류 사회로 진입했다. 정치, 교육, 법조, 의료, 기업, 예술 등 각계각층에서 눈부신 성취를 거두며 공동체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5월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늦봄에 피는 장미는 단순히 아름답기 위해 피지 않는다. 꽃잎 아래서 씨앗을 만들고, 뜨거운 여름을 견디며, 가을이 오면 새로운 땅에 씨앗을 뿌리기 위함이다. 나름 성공의 꽃을 피워낸 한인 커뮤니티의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이제는 ‘성장의 계절’인 본격적인 여름으로 안전하게 진입하기 위한 채비를 해야 한다. 바로 ‘씨앗’을 준비할 때다.
장미에게 있어서 화려한 꽃보다 중요한 것은 꽃의 한가운데서 조용히 씨방을 익히는 것이다. 우리 커뮤니티가 지난 세월 동안 쌓아온 지식과 경험, 자산과 지혜를 어떻게 다음 세대에 온전히 전달할 것인가. 그 핵심은 교육에 있다. 특히 두 문화의 경계에서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정체성 교육’ 이다.
인공지능(AI)이 전문직의 경계를 허물고 미국 사회의 정치·경제 지형이 급변하는 대전환의 시대다. 다음 세대가 거친 풍파를 이겨내고 다시 뿌리내릴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단단한 땅을 다져놓아야 한다. 그 땅의 가장 구체적인 형태가 바로 ‘80%가 넘는 한인 유권자 등록률’과 ‘80%가 넘는 투표율’이다.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비옥한 토양 없이 우리의 다음 세대들은 어떤 씨앗도 제대로 싹을 틔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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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시민참여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