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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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성 부통령’의 의미

2020-11-19 (목)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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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이라는 유리천장이, 대나무천장이 드디어 깨졌다.

카말라 해리스가 ‘미국의 첫 여성, 첫 흑인, 첫 아시아계 부통령 당선인’이라는 새 역사를 쓴 날, 미 전국의 여성들은 울고 웃고 함께 환호하며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환영했다.

“난 내 딸을 안고 울었다. 봐라, 아가야, 그녀가 우리처럼 생겼다”는 인도계 여배우 민디 케일링의 트윗엔 100여만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4년 전 힐러리 클린턴의 충격적 패배에 절망했던 20대 백인여성 모이라 존스턴은 “우리 면전에서 쾅 닫혀버렸던 문을 우리가 힘껏 밀어 열어젖힌 것”이라며 기뻐했다.


“평생 미국에서 살아온 나는 그냥 ‘아메리칸’이다. 그러나 여기 내 나라에서 나를 외국인으로 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한인 여대생 미아는 이젠 이민2세인 해리스가 부통령이 되고 “우리의 정치 대변인들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으니 ‘아메리칸’에 대한 이미지가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대학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기대했다.

해리스의 부통령 당선은 더 많은 카말라 해리스들이 나올 것을 의미한다면서 흑인여성정치인 지원단체의 글린다 카 회장은 자신있게 예고했다 : “앞으로 5~10년 내에 우리는 리더십의 얼굴이 완전히 변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로컬에서 백악관까지”

동등한 권리를 위한 여성들의 오랜 정치투쟁은 첫 여성 부통령 당선으로 중대한 이정표에 도달했다. 금년은 미 여성의 참정권 허용 100주년으로 타이밍 또한 절묘하다. 당선 확정 소식이 전해진 7일 승리 연설을 통해 해리스는 앞서 간 여성들의 희생과 투쟁에 헌사를 바쳤다.

그는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수세대에 걸쳐 “우리 역사 속에서 길을 닦고, 평등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너무 많이 싸우고 희생해온…흑인, 아시아계, 백인, 라틴계, 원주민 여성들”을 기억했고 “한 세기 이상 투표권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던 모든 여성들의 투쟁과 투지, 가능성을 보는 비전의 힘”에 감사하며 “난 오늘 그들의 어깨 위에 올라 서 있다”고 말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미국의 첫 여성 연방 하원의원 지넷 랜킨이다.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지기 4년 전인 1916년 남편의 후광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몬태나 주에서 당선된 랜킨은 승리 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첫 여성 하원의원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해리스도 랜킨의 말을 되새기며 강조했다. “내가 이 직책(부통령)에 오를 첫 여성이 될 것이지만 내가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덧붙였다. “왜냐하면 오늘밤을 지켜본 모든 어린 소녀들은 미국이 가능성의 나라라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성별과 피부 빛과 출신 민족에 상관없이 각자가 이룰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없음을 보여주는 ‘산 증거’가 될 ‘미국의 첫 여성 부통령’은 모든 아이들을 향해 명백한 메시지를 전했다 : “야망을 갖고 꿈을 꾸라. 신념을 갖고 리드하라. 다른 사람들은 본 적이 없어 알지 못하는 네 자신의 모습을 보라. 우리가 여러분의 한 걸음 한 걸음에 박수를 보낼 것이다”


차세대를 키우고 격려하는 것은 지금까지 여성 정치인들의 최우선 과제로 꼽혀 왔다. 2016년 6월 주요정당의 첫 여성 대선후보로 확정되었을 때 힐러리 클린턴도 이점을 강조했다. 그는 온라인을 통해 “큰 꿈을 꾸는 모든 어린 소녀들”을 향해 약속했다. “너희들은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 대통령까지도. 오늘밤은 너희들을 위한 것이다”

트럼프보다 거의 300만표를 더 받고도 패배한 후 승복 연설에서도 이들을 향해 “아직 깨지 못한 가장 높고 단단한 유리천장을 언젠가, 누군가는 반드시 깰 것”이라며 “여러분은 세상의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누려 마땅하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내가 마지막은 아닐 것”이라던 여성 선구자의 100여년전 예언은 첫 여성 대법관, 첫 여성 법무장관, 첫 여성 하원의장, 첫 여성 국무장관, 첫 여성 주요정당 대선후보, 그리고 첫 여성 부통령 당선인의 탄생을 통해 하나씩 하나씩 실현되어 왔다.

특히 금년 선거는 미 정치사의 새로운 장으로 기록될 것이다. 월스트릿저널은 ‘여성의 해’가 “2020년에 진짜로, 마침내 도착했다”고 전한다. 유권자로서, 후보로서, 대선 캠페인의 리더로서 여성들의 파워가 전에 없이 강력해졌기 때문이다.

첫 여성 부통령 당선만이 아니다. 조 바이든 승리의 결정적 요인은 여성 유권자들이었고 여성 연방의원은 현재까지 141명, 그중 유색인 여성은 51명으로 사상 최다를 기록하고 있다. 이제 선거정치의 ‘핑크 물결’은 일시적 현상 아니다. “앞으로 두 백인남성 민주당 대선후보 티켓은 더 이상 상상하기 힘들다”고 미 여성정치센터 데비 월시 소장은 말한다.

그동안 소외당하며 미 사회의 소속감에 회의를 느꼈던 많은 여성과 유색인들에게 해리스 당선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준다. 차별이 사라졌다는 환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사회에서 ‘평등’은 인종적으로도, 성별로도 여전히 현실이 아니라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힐러리 낙선으로 좌절했다 해리스 당선으로 재충전된 젊은 여성들, 수많은 ‘카말라 해리스들’이 “우린 다시 소매를 걷어붙였다”며 새롭게 투지를 다지고 있다. 백인, 흑인, 라티노, 아시안들과 함께 한인여성들도 그 중심에 서 있을 것이다.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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