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저주와 감사

2015-11-21 (토) 김명욱<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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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감사할 일이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감사하기는커녕 세상을 저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감사와 저주는 정 반대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한 세상, 한 마음에서 일어난다. 감사하는 사람은 누구며 저주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파리에서 벌어진 이슬람국가(IS) 테러리스트들은 세상을 저주하며 자신들의 입에 맞는 신정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싸우는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이다. 이슬람전체가 이런 테러리스트는 아니다. 시리아와 이라크의 절반을 점령한 IS는 악 그 자체요 세상을 저주스러운 땅으로 바꾸어 가려는 가장 극악한 테러리스트 존재들이다.


감사의 달인 11월에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국가 테러리스트들의 테러는 감사를 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로 132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포함해 50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사망자 가족과 부상자 가족들은 지금 이 시간에 어떻게 감사를 올릴 수 있겠는가. 이래도 감사해야 할까, 아닐까!

난감한 질문이다. 악은 왜 세상에 존재하는가와 같은 어려운 질문에 속한다. 감사와 저주는 상대적이다. 저주는 할수록 저주를 낳으며 세상을 어지럽혀 나가게 된다. 감사도 그렇다. 감사 할수록 감사할 일이 더 생기며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나간다. 그렇다면, 테러리스트들한테 당하면서도 감사해야 할까. 그리고 감사의 조건은?

우선 감사해야할 조건은 세상을 저주로 이끄는 그들보다도 세상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데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악을 악 되게 하는 소수다. 하지만 지구촌의 대다수 사람들은 평화스러운 지구를 원한다. IS와 같은 존재들은 극단소수의 무리로 아직도 다수의 힘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다.

지금까지 인류는 수많은 전쟁을 치루며 지탱돼 왔다. 그 중에서도 2차 대전은 악의 존재 같은 히틀러를 다수의 연합군이 제압한 좋은 본보기가 된다. 소수의 의견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다수가 지닌 보편성이 더 중요할 수가 많다. 평화를 사랑하는 자가 많은가, 테러를 원하는 자가 더 많은가. IS의 종말은 정해진 수순이 될 거다.

구약성경의 창세기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온다. 그는 아내 사라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자 사라의 몸종인 이집트 여인인 하갈에게 들어가 잉태를 시켜 이스마엘을 낳는다. 나중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자 하갈과 이스마엘은 사라로부터 쫓겨나 아랍 땅 사막으로 가게 된다. 그러니 이스마엘과 이삭은 배 다른 형제가 된다.

저주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신(神)의 저주와도 같은 쫓겨남으로 사막에 내동댕이쳐진 이스마엘의 후손인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창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슬람종교가 신의 저주는 아니다. 이슬람극단주의로 구성된 IS가 신의 저주로부터 태동된 악의 존재와도 같이 저주의 산물들이 되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을 뿐이다.

워싱턴과 뉴욕 등 전 세계의 크고 중요한 도시들이 초 비상경계에 돌입했다. 감사의 절기에 이 무슨 비상인가. 언제 어디서 또 다시 IS의 테러가 발생될지 모르기에 그렇다. 무 특정다수를 노려 자살폭발물을 터뜨리며 자동소총으로 무참한 학살을 자행하는 그들이야말로 저주와 악의 산물이 아니라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은 살아계신가!라며 왜, IS를 가만 놔두는지 모르겠다고 어느 신도는 울분을 토한다. 그래도 우린 창조주에게 감사를 드려야만 하지 않을까. IS와 같은 저주의 산물들은 반드시 제거되어 이 세상이 평화로운 세상이 되도록 창조주는 인도하실 터이니 그렇다. 그것이 믿음이다. 감사의 계절, 감사의 사람이 되어 이 땅의 평화위해 기도해봄도 좋을 것 같다.

<김명욱<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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