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소변에 혈이 섞여 나온 친구

2015-10-1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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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객원논설위원>

삶과 죽음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옹다옹 싸우며 살아도 언젠가는 반드시 사람은 죽게 돼 있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다른 동물과 식물 그리고 우주에 수십억 개나 되는 별들까지도 죽음의 시나리오가 담겨져 있다. 하루살이의 생은 하루에 그치지만 별들의 생은 수십억 수백억년 까지도 가는 것들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길게 잡아도 100년 안팎이다. 하루살이에 비하면 무척이나 길고 별들에 비하면 아주 짧은 찰나 같은 순간을 사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요 삶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 허무하고 또 어찌 보면 너무나 귀중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단 한 번의 생과 삶.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의 문. 그 문을 비껴갈 자는 아무도 없다.


친구 한 사람이 있다. 60평생을 별 병 없이 살아온 이 친구. 얼마 전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온다고 했다. 그것도 아주 진한 피들이. 생후 처음 있는 일이라 이 친구 너무나 당황했나 보다. 전화를 걸어와 “이거 얼마 안 있다 죽는 거 아니야!”하며 괜히 듣는 사람도 서글픈 목소리로 금방 죽을 것 같이 말한다. 그러며 안절부절 이다.

이 친구는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더욱이 소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육질의 음식은 거의 먹지 않고 식물성과 밥, 김치만 주로 먹는 순 한국식 타입의 친구다. 가까운 사람들이 이 친구를 두고 하는 말이 “너는 100살은 거뜬하게 살겠다”였다. 그러나! 모를 일. 어쩌다 친구의 소변에 진홍 같은 피가 섞여져 흐를까.

지금도 이 순간,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희망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사는 것이 아닐까. 그들에게 있어 가장 부러운 것은 걸어 다니는 사람들, 잘 먹는 사람들, 잘 싸는 사람들, 잠 잘 자는 사람들일 것 같다. 그 외에 그들이 부러워 할 것이 무엇이 있겠나. 돈과 명예도 그들에겐 별 가치가 없다.

여기서 발견해야 할 것은 일상에서의 감사와 가치다. 하루하루 자고 먹고 일하러 다니는 그 것이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 줄 모른다. 대궐 같은 집에 살며 수십만 달러의 차를 몰고 수억 나가는 시계와 보석 등을 걸친들 그 사람이 단 하루밖에 살지 못한다면 그 호화로움이 다 무순 소용이겠는가. 참으로 허무한 것들이지 않는가.

사람들 중엔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살아갈 듯 기고가 만장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 모두 제 잘난 멋에 사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인생이란 그리 긴 게 아니란 걸 빨리 깨닫고 살아야 기고만장함이 멈추어진다는 것을 어쩌랴. 겸손히 살아가는 것. 사람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 하늘이 부르면 언제라도 가야한다는 것.

이 정도는 알고 살아가야 되지 않을까. 죽음에 관한한 장자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장자의 아내가 죽었다. 장사 날 곡을 하며 슬퍼해야 하는데, 장자는 꽹과리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친구가 장자에게 물었다. 뭐하는 짓이냐? 그러니 장자 왈, 사람이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아내인데 왜 슬퍼해야 하냐며 오히려 친구를 마무란다.

장자의 얘기는 범부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죽음, 하면 우선 두려움이 앞서는 게 상식이다. 소변에 혈(血)이 섞여 나온 친구는 죽음의 두려움이 찾아왔다 한다. 그가 두려움과 더불어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그동안 잘 해주지 못한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라 했다. 다음이 친구들이라 했다. 가족과 친구들의 소중함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삶과 죽음. 동전의 양면 같지만 영원히 합쳐질 수 없음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양면의 몸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죽음과 삶도 생을 떠난 우주 내에서는 하나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존재하지 않을까.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온 그 친구.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오늘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잘하고 싶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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