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하까란다’

2015-05-1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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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애(시인)

멕시코시티, ‘하까란다(라일락 같은 보라색 꽃이 피는 나무)’가 가로수로 늘어서 있는 도심을 지나며 떠나온 한국의 70년대를 떠올리는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다. 같이 길 떠난 친구도 화사하고 정겨운 도시풍경을 어린애처럼 반긴다.

낮은 지붕들은 겸손하게 다닥다닥 붙어서 멀리 있는 높은 산들과 대조를 이룬다. 어디서나 사람들은 비슷하게 살아가고 해 아래에는 새로운 풍경도 새로운 일상도 없다는 깨달음(?)을 가지고 있는 나와는 달리 작은 것에도 환호하고 기뻐하는 사람과 같이 하니 사소한 것들이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하까란다는 사순절에 피기 시작하여 부활절에 지기 시작한다.
호텔에서 만난 건강한 미인 건축가 안드레아가 화가인 프리다 카를로(Frida Kahlo)의 생가를 방문한다고 해서 현지인인 그와 함께 안전하게 택시를 타고 안전하지 않다는 거리로 나섰다. 하까란다 꽃 같은 짙은 보라가 섞인 청색 건물이 프리다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작업장이며 생가였다.

유명한 사진작가를 아버지로 둔 프리다는 유명한 남편과 결혼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교통사고와 결혼생활이 그녀에게 닥친 두개의 대형 사고라고 할 만큼 그것들은 그녀 일생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섬뜩한 그림들을 남기는데 일조했다. 그래서 더 유명세를 타게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불행한 여류화가의 일생을 아는 것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계속되는 수술과 인공유산, 남편의 여성편력이 작품의 소재여서 대중에게는 불편한 진실, 혹은 낯설음으로 다가갔을 성 싶다. 처제와 불륜을 저지를 만큼 부도덕한 디에고였지만 그의 작품은 더없이 훌륭하고, 프리다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에도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날씨는 화창하고 나무들은 일조량이 많아서 푸른 잎들을 자랑하며 진한 색깔의 꽃들을 달고 있다. 선인장과 이름 모를 나무들이 어우러진 정원에도, 그림이 전시된 작은 방들에도 사람들은 가득하다. 후세 사람들은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태우다 간 화가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뮤지엄을 만들고, 긴 줄을 마다 않고 기다리고, 삶의 상처와 아픔에 공감하며 천천히 작품들을 둘러본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란 시가 생각난다. 사랑도 상처도 아픔도 지나가지만 그림들은 남아 옛날의 기억들을 돌아보게 한다. 조촐한 침대와 레이스로 짠 침대보, 소박한 집기들은 당시의 멕시코 사람들의 생활상을 잘 보존하고 있다. 딱딱한 돌 의자에 앉아서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는 정원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디선가 슬픈 음조를 띤 남미 음악과 함께 금방이라도 프리다 카를로가 나타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하까란다와 프리다의 짧은 생이 교차하며 이 봄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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